<세상의 자막들>채송화, 봉선화 꽃을 생각하다
<세상의 자막들>채송화, 봉선화 꽃을 생각하다
  • 임영석
  • 승인 2017.09.2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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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석<시인,문학평론가>

채송화 꽃과 봉선화 꽃이 뒷마당 한쪽 장독대 옆에 터를 잡고 아침 해가 뜨면 활짝 꽃잎을 펴고 작은 꽃씨를 앙다물 듯 담고 있던 모습이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또한 봉선화 꽃과 잎을 따서 손톱에 물들였던 누님의 모습은 아직도 열다섯 소녀로 고향집 뒤뜰에 앉아 사각거리는 댓바람에 머릿결이 휘날리며 앉아 있는 듯 선하다.

하지만 요즘 이런 장독대가 있고 채송화나 봉선화 꽃이 피어 있는 집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파트 화단이나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의 경우 장미나 화려함이 두드러진 꽃들이 이미 자리를 잡아 채송화, 봉선화 꽃을 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식물원이나 야생화 꽃을 가꾸는 곳에서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미 우리들 정서가 한국적 서정의 문화에서 이국적 서정의 멋에 더 익숙해져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40년 봉선화는 일제강점기에 홍난파 선생이 곡을 써 그 서러움의 한을 노래로 불렀던 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 /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홍난파 작곡 〈봉선화〉 가사 전문

나는 홍난파 작곡 〈봉선화〉라는 곡을 보면서 너무 서정성과 나약함에 치우쳐 곡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1940년대의 시대적 현실이 울 밑에 선 봉선화처럼 우리들 모양이 처량하고 북풍한설 찬바람 불어오는 가을이면 꽃의 형체가 살아지는 표현으로 조선의 운명과 함께 한다고 마음을 이끌어 내어 우리들 스스로가 더 저항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홍난파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우리 역사에 있어 반민족행위자로 활동을 했기에 오늘날까지 매국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대표적 예술가다.

봉선화는 그렇게 나약하거나 힘없는 꽃이 아니다. 여름 땡볕에도 굳건하게 꽃을 피우는 꽃이다. 여름에는 날이 뜨거워 배추나 무 등 다른 채소들은 자라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봉선화나 채송화는 그 더운 여름날에도 꽃을 피우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이다. 이런 강한 생명력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민족의 끈기나 올곧은 정신을 뒤로하고 한과 서정의 바탕 이면에는 홍난파 선생의 정신에 조선이 사라지고 일제강점기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만 담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부 사람들은 “노래는 노래로 생각하고 꽃은 꽃으로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그 혹독한 강압에도 숨어서 그들의 만행을 일기 속에 담았다. 우리가 잘 아는 『안네의 일기』가 바로 그 책이다.

지금 우리가 뜨거운 여름에 피는 채송화나 봉선화 꽃을 멀리한다는 것은 더 향기가 짙고 더 큰 꽃, 그리고 무엇보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마당과 뒤뜰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채송화와 봉선화 꽃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고 본다. 전국의 꽃의 축제가 그렇게 많이 있어도 봉선화나 채송화를 주제로 꽃의 축제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했던 채송화, 봉선화 꽃도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채송화 꽃이 활짝 핀 우물가 풍경과 봉선화 꽃이 활짝 핀 장독대 풍경을 주제로 한 한국적 정원이 공원이나 학교, 아파트 화단 곳곳에 자리하기를 바란다. 채송화, 봉선화 꽃이 나약함의 상징이 아닌 뜨거운 태양의 빛도 이겨내는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꽃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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