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흥원창 한자 이름 바르게 쓰자
<김대중 칼럼>흥원창 한자 이름 바르게 쓰자
  • 김대중
  • 승인 2017.10.16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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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언론인>

지금은 세금을 현금으로 내지만 옛날에는 쌀 같은 현물로 냈다. 세금은 국가 운영에 가장 중요한 바탕으로 세금을 걷는 조세제도는 국가 통치의 근간이 됐다.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고 운송하는 일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나 중세시대에는 거둔 세금의 운송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전국 곳곳의 국민들로부터 거둔 세금을 도성으로 어떻게 운반할 지가 늘 숙제였던 것이다. 지방 곳곳의 백성들로부터 거둔 현물 세금 조세미(租稅米)를 도성으로 운송하는데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역원제 또는 역참제이고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조창제(遭倉制)다.

조창은 이 시대에 조세로 거둔 현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다시 도성으로 운송하기위해 수로(水路)인 강변에 설치한 창고 및 이 일을 담당하던 기관을 이른다. 세곡의 수납 보관 운송 기능을 한 것이다. 단순 창고를 넘어선 굉장히 중요한 국가의 기관이었다.

고려 성종(992년)때 처음으로 개경 이남에 12조창, 이북에 1조창 등 13조창이 설치됐다.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다시 12조창으로 운영됐다.

각 조창에는 판관(判官)이 배치됐고 중앙에서 감창사라는 관리가 파견돼 횡령 등 부정행위를 감독 조사했다. 그 아래 색전(色典)이라는 향리도 있었다.

조창은 그만큼 중요했다. 고려, 조선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자와 사람의 교류가 넘쳐났다. 조세제도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조창의 지역에대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흥원창은 전체 조창 가운데서도 규모나 기능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쌀 200석을 싣는 평저선 21척을 소유한 전국 최대 규모였다. 남한강과 섬강이 합쳐져 도성쪽으로 가는 매우 중요한 수로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사에서 수로인 물길은 문명 발달의 핵심 조건이었다.

원주는 예로부터 역사와 문화, 교통의 요충지였다. 뛰어난 물길인 남한강 때문이다. 그 물길을 이용해 사람이 교류했고 물자가 유통되면서 역사와 문화가 번성했다. 부론(富論)이란 지명도 그렇게 유래됐다고 한다. 사람들의 왕래와 교류가 풍성해지면서 말(言)이 많아졌고 자연스레 좋은 정보가 픙부해져서 생겼다고 한다. 흥원창이라는 역사적 자산이 원주에 있다는 것은 행운중의 행운이다. 이런 복을 어디서 또 구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주변의 경치마저 뛰어난데다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인물들도 무궁무진하다. 흥원창은 원주를 역사 문화의 보물로 만든 요즘말로 보물의 플랫폼이었다. 천번 만번을 자랑해도 지나치지 않은 보물이다.

요즘 흥원창의 존재는 화려한 역사에 너무나 비교된다. 복원사업은 어떤 콘셉트로 접근했는지 몰라도 추진하다 중단됐다. 주변의 뚝방길은 전부 포장 귀신이 덮쳤다. 괴물 사대강 사업이 낳은 상처로 예전에 들꽃으로 뒤덮였던 뚝방길의 맛은 흔적도 없다. 이름도 제멋대로다. 고려시대 이름 흥원창(興元倉)은 조선시대 와서(興原倉)으로 변경됐는데 아직도 그대로다. 인터넷에도 혼용돼 혼란을 주고 있고 무엇보다 지역에서는 고려시대 한자 표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원주의 진짜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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