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방한담>사람에 대한 예의
<차방한담>사람에 대한 예의
  • 금태동
  • 승인 2017.11.08 08: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금태동<시인>

사립문 앞에서 손님이 ‘주인장 계시오?’하고 소리치면 아버지는 하시던 일을 멈추고 의복을 고처입고 손님을 정중하게 사랑으로 안내를 하셨다. 손님에게 아랫목을 권하였고 손님은 손사래를 치며 아랫목을 거절하였다. 결국 아랫목은 비워두고 서로가 마주보고 부복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저는 봉화 금문 32대로 일휴당 할아버지의 16세손 중호입니다.

처가는 서애 선생의 직계손인 풍산 류 씨 가문이며 슬하에 삼남일녀를 두었습니다.”라고 아버지의 장황한 자기소개가 끝나면 손님은 같은 방식으로 자기소개를 한 후에 “어느 마을의 누구 소개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하면 그때서야 서로가 두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며 진심을 담아 반가움을 표시한 후에 정좌를 하여 마주 앉으셨다.

어김없이 나는 작은 양은주전자를 들고 건너 마을 주막으로 막걸리 심부름을 가야했고, 어머니는 작은 소반에 안주거리를 가지런하게 준비하기에 분주하였다. 내 익숙하기만 한 어린시절의 기억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정착민족이다. 조상이 터를 잡고 살던 곳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생계를 꾸렸고, 이웃하고 사는 동네의 사람들과 매우 친숙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가 외가 처가는 물론 가문의 뿌리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했고 믿을만한 지인의 소개가 있지 않으면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오래된 전통의 관습이 오늘날까지 원주민 텃새라는 형식으로 남았으리라.

현대 산업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려면 거대한 산업화 구조의 틀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고독한 승부를 내야한다. 냉혹한 삶의 현장에 내던져진 이방인이나 늘 그곳에 있던 원주민이나 간에 스스로를 지키기에 지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보편성을 잃은 사람에 대한 결례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반세기 전 내 아버지와 손님의 인사법을 따르자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제 오늘이 아닌 이기주의의 극단적 사고가 결국은 자신을 망치게 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환기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SNS를 통하여 소통하고 있다. 트랜드가 그러하니 그 틀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소외되기 일쑤다. 조금 알고 익숙해진 SNS는 편리하고 유용하였다. 내가 운영하는 다도사랑방의 홍보도 비교적 쉽고 용이하게 할 수 있었고, 개인이나 다중에게 알리는 방법도 손쉬운 측면이 있었다. 바보상자라 불리던 텔레비전이 일방통행이었다면 SNS는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측면에서 혁신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소통의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보니 오해가 쌓이고 불협화음이 잇따르면서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여 예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문제다.

만나서 대화로 할 이야기가 있고 편지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 전화나 전보로 할 이야기가 따로 있다고 했다. 요즘은 SNS로 해야 할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을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대화를 하는 어떤 이야기든지 그 저변에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 의식이 깔려 있어야 할 것이다. 귀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 스스로 요즘 멀리 하게 된 인연 깊은 사람들의 면면은 언어로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고, 불통인 이었고, 교만한 사람이었다. 아픈가? 나도 쓰리고 아파서 지금 견디기가 어렵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