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어머니 가시는 길...순간을 놓치지 마세요.
<기고>어머니 가시는 길...순간을 놓치지 마세요.
  • 임길자
  • 승인 2018.01.29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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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길자<정토마을 원장>

먼 길 떠나는 그님을 배웅이라도 하려는 듯 하늘에선 종일 겨울비가 내렸다. 금생(今生)을 떠날 채비를 하는 요 며칠 그님은 몹시 힘들고 고단한 나날이었다. 슬하에는 딸이 넷 있다는데 그님을 찾아오는 딸은 둘째 한명 뿐이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시설에 모시고도 어머니를 만나러 오는 간격은 점점 멀어져 갔다. 아침 출근길! 미쳐 기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간호사가 전화를 했다. “000어머님께서 이제 더는 어려울 것 같다고... ” 어르신의 상태는 매우 위중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요청에 따라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오전 10시쯤 딸은 내게 전화를 했다. 어머님의 상태를 묻는 전화다. 이미 어머님의 상황은 우리 간호사로부터 충분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무슨 사연이 있겠구나 싶었다. 딸의 사정은 이러했다. “아주 오래전에 친구들과 일본여행을 계획해 놓았는데 출발하는 날이 오늘이다. 지금 인천공항에서 출국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며칠 더....그동안 여러 번 위기가 있었지만 고만고만했으니... 원장님! 어떻하면 좋을까요?”라고. 나의 답은 이랬다. “지금 이곳으로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시간이 언제일지는 하늘만 알겁니다. 지금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순간을 놓치지 마세요. 그로 인하여 어머님을 서운하게 하지 마세요.” 라고.

우리는 그님과 9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했으니 색다른 사연들도 많았다. 당신 발로 흙을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라기에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양쪽 어깨를 부축하고 맨발로 마당을 걷던 일, 활짝 핀 영산홍을 보면 횡성 고향집이 생각난다기에 뒷산에 핀 철쭉꽃을 꺾어다 머리에 꽂고 사진도 찍었었지. 하얀 민들레는 약초라고 말씀하시니 어디에 어떻게 약이 되는 줄도 모르는 채 주변 풀밭을 살피며 하얀 민들레를 뜯어서 그님 방바닥에서 말렸던 일도 있었다. 그님은 지난 2008년 9월에 정토마을 가족이 되었다. 당시 나이는 72세! 뇌경색으로 오른쪽 편마비!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누군가의 직접도움이 필요했으나 언어적 의사소통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전에 계시던 곳에서는 그님을 “00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기관에서는 그님을 그냥 “어머니”라고 불렀다.

나는 시설운영을 시작하면서 이곳에서 살게 되실 어르신들의 호칭을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비록 몸도 맘도 상처가 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르신을 어떻게 불러드리면 “이렇게라도 살아있다는 것이 의미 있어 질까?” 하는 생각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아직은 우리들 곁에 더 계셔달라는 의미에서 할머니 보다는 “어머니”라고 불러드리기로 전체 직원들과 약속했다.

매년 설날이 되면 우리는 전체직원들이 한복을 입고 어머님들께 세배를 드린다. 자녀들이 차린 명절 상에 비할 순 없겠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착한 명절을 준비한다. 세배를 올리고 “까치까지 설날은 어저께 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 풍악과 함께 한바탕 소리마당이 펼쳐진다. 어느 해 설날 오전 행사를 마치고 내 방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찾는다기에 방으로 갔더니 내손에 봉투를 쥐어 주셨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원장님께 드리는 세뱃돈이야. 고맙다는 인사를 이제야 하오. 나를 할머니가 아니고 어머니라고 불러줘서 고맙구려. 비록 한쪽이 마비가 와서 제대로 쓰진 못하지만 아직은 더 살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겨. 감사하오” 라고. 봉투 안에는 천원짜리 지폐가 석장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님은 겨울비가 내리던 그날 오후 3시 7분에 두 눈을 꾹 감은 채 먼 길을 떠나셨다. 그 딸은 끝내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님의 비보(悲報)를 듣게 되었다. 순간을 놓쳤다. 그님께선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특별한 몸짓도 없었다. 금생에서의 숱한 사연을 아쉬움과 서운함으로 덧칠해 놓고서 그렇게 몸은 식어갔다.

착하고 고왔던 그님!

고통도 없고 불편함도 없는

온전한 그 세상에서

부디

영면(永眠)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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