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인생의 설계도에 새 도형 삽입하다.
<살며 사랑하며>인생의 설계도에 새 도형 삽입하다.
  • 임길자
  • 승인 2018.06.25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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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자 <정토마을 원장>

한동안 미세먼지 ‘나쁨’ 때문에 바깥바람을 정직하게 마주하지 못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몸도 맘도 불편한 어르신들이 사는 곳이다 보니 바깥 환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좋음’이라는 기상청 보도에 반가운 맘으로 시설 주변을 한참 걸었다. 평소 운동이라곤 숨쉬기 밖에 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것도 힘이 들었던지 숨고르기가 필요해 마당 평상에 걸터앉았는데, 시설 마당 안으로 낯선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내리지 않아 가까이 가 보니 운전석에 한 남자가 눈을 감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할까 하다가 노크를 했다. 나이가 60은 되어보는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아 미안합니다. 잠시 생각 좀 하느라고요. 이 시설에 원장님 좀 뵈러 왔는데 계신가요?”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내 사무실로 안내를 했을텐데 그날은 날씨가 좋길래 지난해 예쁘게 조성해 놓은 작은 공원으로 안내했다. 간간히 옷깃을 헤집는 바람이 착한 기운을 보탰다. 잠시 후 시원한 오미자차 두 잔을 들고 나와 한잔 건네며 내가 원장임을 밝히고 이야기를 청했다.

“제겐 치매를 잃고 계신 어머니가 계시는데 이곳에 모실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아버지는 지난해 편마비로 거동이 어려워져 요양시설에 입소를 시켰는데, 어머니마저 혼자 생활이 곤란해 졌습니다. 고민 끝에 부모님을 모두 같은 요양시설에 입소를 시켰는데 얼마 전 시설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시설 내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수시로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일삼아 부득이 한분을 다른 기관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어렸을 제 기억은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동 때문에 우리 집은 늘 슬펐습니다.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집안 살림을 부수는 등... 우리 가족에게 집은 다정하고 편안한 쉼터가 아니라 두려움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대접이 좀 나았지만 어머니는 참 힘들게 사셨습니다. 요즘 저는 어머니가 불쌍해 죽겠습니다. 앞으로 사실 날이 얼마나 있을래나 싶어 잘 해 드리고 싶은데 여전히 아버지은 이 아들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 원망이 밀려옵니다...<중략>

그래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떼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어머니는 치매로 기억력이 좀 감퇴되긴 했지만 일상적인 행동(수저사용, 화장실 등)은 양호한 편입니다. 다만 혼자서 밥을 챙겨 드시기가 곤란하고, 집을 나서면 길을 잃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오랜 세월 자신이 보고, 겪고, 느낀 부모님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부모님께는 과거가 된 이야기지만 자신에겐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서글픔이 그의 얼굴에 묻어났다.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한 여자의 남편이면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 “가정”이란 울타리를 성실히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부부(夫婦)! 전생에 서로에게 진 빚이 있어 만난 사람들이라서 금생에 그리 다툼이 잦은 걸까?

그의 불편한 이야기를 들으며 부부라는 이름으로 30년을 넘긴 내 삶의 공간을 살펴본다. “일”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가정 언저리에서 그들의 속내를 살피며 살아 온지 이제 십년이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못 만났을 그 사람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그들의 질퍽한 사연들! 그 사람들과 그 사연들 속에서 오늘 나는 인생의 신맛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여러 갈래로 덧칠되어 있는 내 인생의 설계도에 새 도형을 삽입한다.

인간은 누구나 늙기 마련이다. 늙음은 세월과 함께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늙음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노화라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방도 또한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늙음을 정면으로 받아드릴 각오를 하고 자기 나름의 대처와 준비를 하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삶이 아닐 까 싶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부인 에레나 루즈벨트 여사가 “아름다운 젊은이들은 자연의 우발적인 산물이지만 아름다운 노인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이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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