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활자의 숲’에서 치유하기
<비로봉에서>‘활자의 숲’에서 치유하기
  • 심규정
  • 승인 2018.09.03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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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원주신문 편집장>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일치된 견해, 아니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 있다. 책은 ‘활자의 숲’이라고. “책이 웬 숲”이라며 뚱딴지 같은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책은 거대한 숲이다. 자음과 모음이 짝짓기해서 낱말이 된다. 낱말이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룬다. 그 문단들이 모여 한권의 책이 세상에 태어난다. 활자의 숲을 산책하다 보면 다양한 메시지를 접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K문고는 거대한 숲이다. 2주에 한번꼴로 찾는다. 한번 가면 책을 왕창 산다. 테마별로 가지런히 진열된 책장 사이를 산책하며 책을 고른다. 한 바퀴 돌고 다시 거쳐간 산책길을 거닐며 “혹시 나랑 궁합이 맞는 책은 없을까?” 하고. 족히 30m 되어 보이는 책상에서, 또는 바닥에 주저앉아 저마다 책을 탐닉하는 모습에서 몰입의 극치를 엿볼 수 있다.

원주에서 K문고를 오가고 둘러보는데 무려 5시간 걸린다. “굳이 원정까지 가서 책을 살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 인터넷 주문이 대세라던데...”이런 반응을 보이는 지인들의 질문에 “다양한 책과 대화하기 위해섭니다”라고 말한다. 책은 마음을 맑고 편하게 해주는 벗이다. 담백하고 맑은 차 한잔의 느낌을 주는 에세이집, 다소 무거운 주제, 이를 테면 인구소멸, 고용절벽, 정치인들의 악다구니를 간파한 정치·사회 분석보고서 형식의 책, 가족과 함께 마음 편하게 둘러본 느낌을 주는 문화재 관련 책,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글쓰기 방법에 대한 책, 부담없이 술술 읽히는 자기계발서... 어떤 글은 처연한 숲에서 들릴 듯 말 듯한 화음같고, 무거운 주제에선 남성의 묵직한 바리톤 음성 같다. 책 속에서 와글와글 대던 단어, 어휘의 파편들이 달팽이관을 파고들어 머릿속에 각인된다.

책을 구하기 위해 원정을 마다하지 않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언젠가 불현듯 위기감이 엄습했다. 평소 구사(驅使)하는 단어, 어휘가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직업 때문인지 저널리스틱(journalistic)한 문체가 몸에 배어 어휘구사력 등 글쓰기 방법의 확장이 시급했다.

또 하나는 일종의 도피다. 세상잡사가 모여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머릿속은 ‘정보의 창고’가 되었다. 갈등과 이전투구라는 뉴스 가치를 선호하는 저널리즘의 속성상 그 화약고를 피할 수 없는 것은 숙명이다. 몸은 천근만근, 뒷목이 뻐근할 때마다 “모든 것을 잊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라고 혼자말로 되뇌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고 “스스로 쌓은 편견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은 아닌지?” 자문자답(自問自答)하는 일이 많아졌다.

최근 흥업면 대안리 명봉산 중턱에 자리한 터득골 북카페를 찾았다. 집이 듬성듬성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자리했다.

도로에서 카페까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열악한 접근성에 “이런 곳에 북카페가 있다는 게 생뚱맞다. 이런 곳에 사람이 오겠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기우였다. 카페에 들어서니 책벌레(?)로 보이는 시민들이 책 속에 빠져 있었다. 주로 가족단위 마니아로 보였다. 책장에 꽂힌 손때 묻은 다양한 책들이 유혹하고 있었다. “외지에서도 많이 온다”는 게 주인장의 말이다. 비온 뒤 산허리 곳곳에 살포시 내려앉은 뭉게구름, 그리고 대지에 낮게 깔린 흙내음, 싱싱한 풀내음과 어우러진 카페의 모습에서 책을 읽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숲이 알록달록 오색한복을 입을 즈음 북카페 한 구석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9월의 독서의 달이다. 사늘한 바람이 내 몸을 가볍게 때릴 때 책 속에 담긴 단어, 문장의 조각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마음의 크기와 넓이가 한층 충만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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