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어머니의 유품...일기장
<비로봉에서>어머니의 유품...일기장
  • 심규정
  • 승인 2018.09.17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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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원주신문 편집장>

지난 2월 이승과 작별한 어머니는 일기장을 남기셨다. 무려 다이어리 25권 분량이다. 그동안 겪은 좌절과 고통의 순간, 이를 극복하는 과정, 가장 기뻤던 일, 부모님 병상기록 등 우리가족의 희노애락이 빼곡히 담겨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이 일기장에는 그동안 전혀 몰랐던 가족사는 물론 필자에 대한 부침까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관(史官)이 역사를 기록하듯, 가족사를 하나하나 기록하셨다. 살아생전 일기를 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안방 화장대 앞에 다소곳이 앉아 뭔가를 메모하는 것을 보고 “엄마 뭐 해”라고 하자, “말 시키지 마”하고 몰입하던 그런 분이셨다.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은 내용에서는 자식들에게 “이 부분을 꼭 기억해 두렴”하고 강조하시는 것 같았다. 이 일기장은 현재 거실 장식장 옆에 보자기에 싸서 신주 다루듯 모시고(?) 있다. 잠언(箴言) 같은 말씀은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어머니의 일기를 가보(家寶)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자식을 향한 진한 모정과 평소 가르침 때문이다.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좋은 날이 오겠지”, “잘 될 거야”, ”마음을 즐겁게 먹어야지”, “살다 보면 오르막길, 내리막길, 흐린 날, 맑은 날이 있는 거지...”라고 애써 초연(超然) 했다. 심지어 마지막 문장에선 ‘관세음보살’을 추임새 넣듯 자주 읊조렸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절박함,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셨다. 필자가 40대 초반에 방송사를 그만두자, ‘이력서’, ’직장’, ’꼭 (일자리를)찾게 될 거야’라고 적었다. 당시 질곡의 시기를 되새김질하며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간다’란 말을 진리로 여기듯, 긍정적인 자기암시를 주문 외우듯, 어머니는 그렇게 되뇌었다. 필자가 새벽형인간이 된 데는 어머니의 ‘근면DNA’를 타고났기 때문인 것 같다. “육신이 편하면 먹을 것이 없고, 육신이 바쁘면 먹을 것이 많다”고 말하셨다. 공맹노장(孔孟老莊)못지 않은 탁견(卓見)은 일기장 곳곳에 박혀있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형님이 과장으로 승진하자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말로 기쁨을 대신했다. 형님이 50인치 TV를 보내온 것을 언급하며 “한참을 울었다”고 적어 코가 알싸했다. “역시 나는 불효자였구나”라며 스스로 자책하며 고개를 이불에 처박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 어머니는 발렌타인데이에 손녀로부터 초콜릿을 선물 받고 “내 생애 머리에 털 나고 처음으로…”라고 들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버님으로부터 생일선물로 꽃다발을 선물 받고 “오래살고 볼 일이다”라고 하셨다. 화색이 돈 어머니의 얼굴이 색 바랜 일기장에 또렷이 새겨졌다. 성탄절 가족과 함께 낙지볶음 드신 것을 기록하며 “정말 맛있었다”고 쓰셨다. “저렇게 사소한 음식에 감동을 받으시다니…” 간혹 산해진미(山海珍味)에 빠져 있던 나를 생각하면 죄스러운 마을 금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느 봄날 문학소녀다운 글솜씨를 뽐내셨다. “꽃들은 만발하건만, 내 마음은 언제 만발할까”하고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추석이 목전(目前)이다. 어머님이 선물로 주신 때때옷, 꼬까신을 입고 맵시를 뽐내던 당시의 흑백사진 속 추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난주 일가친척이 모여 선산에서 벌초를 했다. 끝나고 부모님이 잠든 양평 수목장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울울창창(鬱鬱蒼蒼) 소나무에 새겨진 부모님의 이름표에서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아들! 시간은 만병통치약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 길게 보고 가야 해. 알았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의 무늬가 깊게 새겨지게 마련인 요즘, 어머니의 일기장은 온돌방 같은 따스함을 전해준다. 이보다 더 훌륭한 ‘인생의 교과서’는 어디에도 없다고 본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아니 후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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