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어느 며느리의 추석선물
<살며 사랑하며>어느 며느리의 추석선물
  • 임길자
  • 승인 2018.10.08 05: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길자 <정토마을 원장>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분다. 곡식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어느새 들판엔 황금물결이 일렁인다. 얼마 전 추석명절을 보내면서 부산했던 마음들을 주섬주섬 옮겨본다. 35년 전 가을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미 사회인이 되어 있었지만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 엄마의 자리가 빈 우리 집 그해 가을은 참 많이 우울하고 쓸쓸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는 동안 엄마의 자리는 여러 모양으로 채워지고 비워지고, 또 채워지고 또 비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맘으로 느끼는 엄마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늘 곁에 있던 배우자가 없이 이제는 정말 혼자 남겨진 내 아버지의 올 추석은 많이 우울한 듯했다.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성의를 다해 마음을 내어 보지만 해 질 녘 아버지가 느끼는 고독은 그저 외로움이 아닌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아버지께 또 독설을 올린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혼자가 되고 혼자 떠나는 것이라고...”

추석 다음날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난 출근을 했다. 명절 즈음하여 가족들의 방문도 많고, 더러 외출과 외박을 다녀오시는 어르신들이 계시기도 하여 직원들의 손을 좀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상 출근을 했다. 11시쯤 백일홍(어르신의 실명을 옮길 수가 없어서...)님 며느리가 찾아왔다. 명절에 모셔가지 못한 죄송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는 백일홍님 방으로 갔다. 한 시간 쯤 지난 후 다시 내방으로 돌아온 그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눈빛을 보아 눈물을 많이 쏟은 듯 했다. 심리적으로 진정이 필요해 커피 한 잔을 내어주며 마주 앉았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제가 오늘 어머님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너무 감격하여 한없이 눈물이 났네요”라고 했다. 난 물었다. “그러셨군요. 어떤 선물을 받으셨는지 물어봐도 됩니까?”라고 했더니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을 너무나 힘들게 했습니다. 당신 아들인 저의 남편을 많이 미워했지요. 남편 위로 누님 한 분과 아래로 여동생이 두 명 있는데 그들과의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바로 우리 어머니랍니다.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른지라 웬만하면 서로 이해하고 다독거릴 만도 한데, 어머닌 아직도 제 앞에서 당신 아들에게 입에 담지 못한 욕설을 퍼 붙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만나면 죽을 것 같다며 뵈오려 하지 않고... 중간에서 이렇게 속 끓이고 산 세월이 어느새 40년이랍니다. 그런 어머님이 오늘은 다른 사람이 되었네요. 저를 보고 당신을 용서하라 하시네요. 아들이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것도 당신 잘못이 크다며 그래서 며느리를 힘들게 한 것도 당신 잘못이라네요. 그러니 저보고 당신의 지난날을 다 잊어달라고 하시네요 ”라고 한다. 그는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누가 누굴 원망하랴! 누구를 가해자라 하고 누구를 피해자라 하겠는가? 어머니와 아들의 몸엔 같은 피가 흐르고 있기에,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인지도...

백일홍님은 4년 전 가을 우리 기관에 오셨다. 처음 오실 때 신체적인 조건은 직접케어가 필요할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소 등급은 있으니 가정적으로 무슨 사정이 있나보다 싶어 입소를 허락했다. 입소 후 1년간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어르신이 기거하고 있는 공간에 물건들이 남아나지 않았고, 닥치는 대로 던지고, 찢고, 부수고... 거칠게 쏟아내는 언어는 그동안 내가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다. 어르신을 케어 는 직원들을 향한 폭언과 폭행은 물론 종종 일어나는 어르신들과의 다툼은 늘 우리를 긴장시켰다. 기관을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선 ‘계속해서 모셔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 여러 번 마음속 갈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누가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어르신은 차츰 안정을 찾았고 소식을 끊고 살던 딸들에게 가끔 전화 통화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아들을 향해서는 불편한 진실이 있는 듯하다. 남의 가정사에 지나친 관심은 독이 될 수 있어서 적당한 거리에서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그냥 들어주고 경우에 따라 적당히 그의 편이 되어 주는 말을 건넬 뿐 딱히 도울 일이 없어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내자면 어머니 기억에서 아들의 모습이 지워지기 전에 두 분의 만남을 돕고 싶다. 추석명절 며느리가 받은 선물에 나도 서원(誓願) 한 가지 얹어본다. 부모자식은 천륜(天倫)이라, 거리는 지척(咫尺)이요 마음은 간절하니, 부디 올해를 넘지 않기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