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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조선말 원주의 소녀 여행자 김금원을 주목하자
△ 전영철 <상지영서대 교수>

조선시대 과거급제에 가장 많이 했던 고장의 하나가 원주였다 한다. 한양, 안동, 충주에 이어 네 번째로 과거급제자가 많았다하니 원주에 가서 글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맞는 듯싶다. 특히 임윤지당, 김금원, 박죽서로 이어지는 여류 성리학자, 여류문인의 전통은 지역의 장점이 될듯 싶다.

얼마 전 수능을 끝낸 고3생들에게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배낭여행가 김찬삼선생은 그 어떤 수업보다도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여행이라고 하였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817년에 원주에서 태어났던 김금원은 오늘날 청소년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은유를 던지고 있다.

여성에게 집안에서 살림하기만을 강요당했던 시대에 열네 살의 소녀는 총명함을 갖고 식견을 넓히기 위해서는 여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부모를 설득해 간신히 허가를 얻어낸 소녀는 제천 의림지로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마치 새장에 갇혀있던 새가 새장을 나와 끝없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고, 좋은 말이 굴레와 같은 안장을 벗은 채 천리를 달리는 기분이다.”

자기 삶을 계획하고, 자기행동에 대한 논리를 갖고자했던 여성은 1830년 순조 30년 열네 살의 나이에 제천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한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관동팔경과 설악산을 둘러본다. 그리고 한양으로 이동한 후에 여행을 마친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인 1850년 여행기 ‘호동서락기’를 남기기에 이른다.

“천하의 강산은 크기도 하다. 한 모퉁이 좁은 국토를 보고 온천지를 다 보았다고 여기기에 부족하고 고금의 일월(日月)은 변함없으니 백년사는 뜬 인생으로 만족스럽게 여기기에 부족하다. 중략. 지나간 일도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의 한바탕 꿈이니 진실로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

금원이 금강산으로 떠났던 첫 여행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약 1,000km에 이른다고 하며 하루에 30km씩을 걸어도 약 한 달간의 여행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금은 자동차로 가면 불과 두세 시간 안이면 갈수 있는 금강산 하지만 분단의 땅이기에 200년 전 김금원의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영국에서도 자녀가 자라면 성인이 되기 전에 유럽대륙으로의 여행을 보냈으니 그랜드투어(grand tour) 또는 교양관광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러한 여행의 경험이 있어야만 이 사회의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하였다.

김금원의 여행은 남장을 하고 떠난 여성의 한계와 운명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흐르고 한국관광의 실행을 담당하는 한국관광공사 본사가 원주로 이전했다.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하다. 궁예가 양길의 군사를 얻어 명주를 거쳐 금강산을 거쳐 철원 도성에 이르렀듯, 송강 정철은 한강을 거슬러 금강산을 여행하고 왔다. 원주는 바로 떠남과 돌아옴의 도시오, 길의 도시였던 것이다. 그것도 열네 살 소녀의 몸으로 세상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여성의 꿈이 있었다.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우리의 청소년들이 김금원이 갔던 여행의 길을 따라 수학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게 통일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고 세상을 좀 더 크게 보게 되리다. 원주사람들은 200여 년 전에 같은 공간에 김금원이라는 소녀여행자가가 살았었다는 것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우리도 소녀여행자 김금원처럼 당당하게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으면 좋겠다.

전영철  wjnews01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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