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자막들> 백수 선생님을 그리며
<세상의 자막들> 백수 선생님을 그리며
  • 임영석
  • 승인 2018.12.14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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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석<시인>

2018년도 어느덧 12월 중순이 되어간다. 세월 흐르는 게 강물보다 더 빠르다는 느낌을 갖고부터 과거의 시간들이 더더욱 그리워진다. 오늘은 한국 시조계의 거목이셨던 백수 정완영 선생님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백수 정완영 선생님은 1919년에 태어나 2016년에 타계하셨다. 「조국」, 「산이 나를 따라와서」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88년쯤이니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포에 살고 있을 때, 군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과천을 지나 서울 흑석동에 사시는 선생님댁을 물어물어 찾아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당시 백수 선생님은 60대 초반이셨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셨지만 어린 내가 시조로 등단한 것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찾아뵈었을 때 시조집 『蓮과 바람』을 주시며 열심히 노력하는 길이 최선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당부했다. 나는 그 후로 한 번도 그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선생님의 작품에 버금가는 작품을 쓰겠노라 마음먹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30년 세월이 지나 생각하니 그 허세가 얼마나 당치않은 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세월도 낙동강 따라 / 칠십 리 길 흘러와서 // 마지막 바다 가까운 / 하구에선 지쳤던가 // 을숙도 갈대밭 베고 / 질펀하게 누워 있네. /// 그래서 목노 주점엔 / 대낮에도 등을 달고 //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 낙일 앞에 받아 놓면 // 갈매기 울음소리가 / 술잔에 와 떨어지네./// 백발이 갈대밭처럼 / 서걱이는 老沙工도 // 강물만 강이 아니라 / 하루 해도 江이라며 // 김해 벌 막막히 저무는 / 또 하나의 강을 보데. 〉

-정완영 「을숙도」 全文

나는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시조 중에서 「을숙도」라는 작품을 자주 읽는다. 이 시조 속에는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는 대목이 가슴을 뜨겁게 울려준다. 한 해가 지나가는 12월에 흘러간 지난 세월을 보면 지나간 세월만 세월이 아니라는 앞으로 흘러오는 세월도 세월이라는 우문의 답을 알려주는 듯하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월을 더 열심히 살아갈 때 정말 아름다운 세월의 강을 건너간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세월이라는 강은 그 강을 건너가는 사람에 따라서 아름다움과 깊이가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강이 험한 물살로 시련을 안겨준 강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연어처럼 삶의 가장 보람된 운명을 지켜내려고 거슬러 올라야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세월이라는 강은 그 깊이가 깊고 낮음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본다.

정완영 선생은 내 나이 스물일곱 살에 「을숙도」라는 작품으로 내게 많은 삶의 숙제를 내주셨다. 인생이라는 강은 누구나 한 번 지나가고 건너가야 할 물길이다. 삶의 환경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과 방향이 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방법과 방향이 달라고 한번 흘러가는 세월은 다시는 그 세월을 되돌려 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백수 선생님은 스물일곱 살인 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항상 노력하라는 말을 당부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단법인 담수회 전국지상 백일장 심사를 하면서 당시 여섯 명의 심사위원 중 선생께서 만장일치로 내 작품에 마음을 주신 것도 시조단의 미래에 어린 나에게 꿈을 갖고 작품을 쓰라는 격려였다고 본다.

백수(白水)라는 호는 샘 천자(泉)를 풀어지었다고 했다. 하늘의 샘물을 받아내는 시인이란 뜻이다. 30년 넘게 백수 선생님의 마음을 내 가슴에 섬기어 왔다. 한 해를 보내며 백발의 갈대밭에 서걱대는 갈대보다 더 뜨겁게 바람소리가 울고 있다. 한 해를 흘러간 세월의 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리라. 내 젊은 날은 백수 선생님을 찾아뵈면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는 그 따뜻한 손이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고 있다. 선생님이 끝없이 그리운 날 선생의 시조 전집을 펴서 다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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