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원주이야기>산, 남산, 일산과 도시재생
<김대중의 원주이야기>산, 남산, 일산과 도시재생
  • 김대중
  • 승인 2019.01.21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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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언론인>

원주 도심에는 세 개의 산(山)이 있다. 봉산(鳳山)과 남산(南山)과 일산(一山)이다. 모두 작은 산이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됐다. 원주란 도시의 탄생과 역사를 함께 한다. 원주시민들이 살아 온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멀리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불교문화 유적들을 비롯해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가난했던 시절의 흔적이 가장 많이 축적돼 있다. 봉산의 이름을 따서 봉산동이란 이름의 동까지 탄생한 봉산 주변은 예로부터 원주의 중심으로 부자들도 많이 살았다. 땅 이름도 그렇거니와 교통의 중심이었다. 뱃길까지 연결된 도심의 핫플레이스였다. 근대에 들면서 교육청, 세무서,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몰려 들었다. 원주 최초의 교육기관인 원주초등학교도 봉산동에 들어 섰다. 원래는 1896년 지금의 평원동에 원주군 공립소학교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이후 1926년 무위당 선생의 조부 장경호(張慶浩)님이 지금의 원주초교 부지 33,058㎡를 희사해 1926년 4월에 제대로 된 학교로 신축됐다. 봉산 건너편의 남산은 도시의 중심 산이다. 남산이란 이름의 산은 도시마다 갖고 있다. 그래서 도시의 남산은 도시의 주산(主山)이라고 한다. 그만큼 도시에서 중요하다. 강원감영도 남산을 기준으로 세워졌다. 영서권의 최초 여성 고등교육기관인 원주여고가 탄생한 곳도 남산이다. 일제 교육 기관이던 남산 심상소학교 자리에 1945년에 생긴 신명 여학교가 바로 원여고의 전신이다. 추월대 등 역사와 문화유적도 많다. 전쟁직후엔 피란민들이 작은 산의 비탈에 옹기종기 움막을 치며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지금도 그흔적은 그대로 남아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원주란 도시에서는 당시의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일산은 도심 가운데 있다보니 대부분 택지로 개발됐다. 지금은 일부 작은 숲과 함께 형태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일산은 현대사에 와서 도심의 중심이됐다. 시청사를 비롯해 법조건물 등 공공시설이 일산으로 몰렸다. 다시 그 공공기관들이 떠나고 비어 버렸지만 일산도 봉산, 남산과 함께 도심의 중심축이 됐다. 대한민국이 요새 도시재생으로 시끄럽다. 새로 길 만들고 건물 짓는 거 유난히 좋아하다 보니 순간 텅비어 골칫거리가 된 구도심을 살리자는 것이다. 도시마다 앓고 있는 고질병이다. 정부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해 다시 살리는 사업을 펼친다고 한다. 원주시도 재생이란 사업을 추진하는데 이들 세 개의 산이 있는 동네들이 포함됐다는 소리가 들린다. 봉산, 남산, 일산이 갖고 있는 역사 문화적인 가치가 잘 보존되리라 생각한다. 역사 문화와 원주 사람들이 살아 온 삶의 흔적들은 그 자체가 귀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들을 잘 살려서 재생사업을 펼친다면 강력한 도시 경쟁력이 될 것이다. 다만 남산 쪽의 일부는 이미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 방식이 착수돼 참으로 안타깝다. 역사 문화적 자산들이 거대한 삽질에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알다시피 원주는 역사 깊은 도시다. 수많은 전쟁터가 되고 수탈을 당하면서 성하게 남아 있는게 별로 없어 그렇지 대단한 역사 문화의 보물창고이다. 수탈당하고 훼손되고 버려지고 무시된 원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야기들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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