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원주이야기] 손혜원의원이 원주에 나전칠기박물관 건립하려했다면
[김대중의 원주이야기] 손혜원의원이 원주에 나전칠기박물관 건립하려했다면
  • 김대중
  • 승인 2019.02.11 06: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중<언론인>
김대중<언론인>

손혜원 국회의원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새삼 여기서 그런 시끄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또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으로서 소속의 국정에 대한 일련의 처신은 이미 다 알려졌다. 목포에서의 일도 마찬가지다. 손의원의 나전칠기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 나전칠기 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그의 꿈. 참으로 멋있고 아름답다. 손의원의 꿈 나전칠기 박물관으로 인해 요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끄는 나전칠기는 원주와 뗄 수 없다. 원주는 옻칠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세계의 문화를 강타한 한류. 그 한류의 원조로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를 꼽는다. 우리 역사에서 나전칠기 문화는 통일신라때부터로 정리된다. 현재까지의 유물로는 통일신라때까지의 나전칠기 제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시대의 나전칠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 나전칠기가 고려때 최고의 중흥기를 맞았다. 전성기였다. 나전칠기는 전복, 소라와 옻칠의 융합 작품이다. 우리말로 자개로 부르는 그 나전을 가공하는 기술과 만년의 신비로 불리는 옻칠이 만나서 환상의 궁합을 이뤄낸 것이 나전칠기다. 거기에 주인공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다. 그중에서도 고려인들의 기술과 예술성이 빚어낸 세계적 작품이다. 고려인들의 또 하나의 세계적 명품 상감청자도 나전칠기의 기술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나전칠기 만드는 기술이 상감청자로 진화됐다는 것이다. 세계 일류의 문화를 창조하고 이끌어 간 것이 고려인이다.

그 나전칠기 문화가 조선시대 들어 성리학 영향으로 크게 수그러 들었다. 일제 강점기때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그 자랑스러운 나전칠기 문화는 골방신세로 전락했다.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일제의 천시 교육과 먹고 사는데 바빴던 가난한 시절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의 천부적인 솜씨는 소외됐고, 세계적인 예술품 나전칠기 문화는 더욱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반면 남의 나라에 잡혀 있는 수많은 우리 문화재들처럼 나전칠기 작품들도 대부분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나전칠기와 원주는 어떤 인연인가. 원주는 옻칠의 성지다. 원주옻 품질은 북한의 태천 다음으로 뛰어나다고 꼽힌다. 일본인들이 인정한다. 옻칠 분야의 대한민국 최초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일사 김봉룡선생이 나전칠기의 꽃을 피운 곳이다. 일사 선생 때문에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들었고 지금도 국가무형문화재를 비롯 강원도 무형문화재와 공예인들이 수십명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옻칠회사인 원주칠공예주식회사 건물도 남아 있다. 보존 관리를 못해 사유재산이되면서 원형이 사라져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아프고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런데 옻칠기공예와 관련한 박물관은 고사하고 기념하고 보존 계승할 인프라는 아무것도 없다. 국회의원이고 시장이고 누구하나 그런 공약 내세우는 자가 없었다. 손의원의 전통문화에 대한 안목은 탁월하다. 통찰의 깊이가 역시 브랜드 네이밍 스타답다. 그로 인해 나전칠기가 새롭게 주목받고 인식됐으니 감사하다. 다만 그 뛰어난 능력을 옻칠의 성지 원주에 보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옻칠의 성지 원주도 구도심은 다 망가져 간다. 거기다 나전칠기 박물관을 짓겠다고 했더라면 세상은 뭐라 했을까. 아무튼 나는 쌍수로 환영하고 지켜줬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