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귀는 좀 안 들려도 괜찮아, 눈은 아직 멀쩡하니까
[살며 사랑하며] 귀는 좀 안 들려도 괜찮아, 눈은 아직 멀쩡하니까
  • 임길자
  • 승인 2019.02.18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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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길자<정토마을 원장>
△ 임길자<정토마을 원장>

얼마 전 명절 즈음하여 지인들과 저녁식사를 위해 무실동 어느 곰탕집에 들어섰다. 식당엔 네댓 명의 손님들이 두 테이블로 나누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앉으려던 바로 옆 자리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어른이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알았어요. 예 알아서 할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글쎄 알았다니까요. 아이 참! 제가 알아서 할께요. 예 저는 잘 들립니다. 그 말씀은 아까 하셨어요. 예 제가 기억하고 있을께요...” 전화통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아마 상대방이 이쪽 이야기를 잘 못 들으시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주변 사람들의 불편한 눈초리를 알아차린 듯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밖으로 나갔다. 특별한 내용이 아니면 전화를 끊을 법도 한데 그는 밖에 나가서도 전화기에 대고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얼마큼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전화통화를 끝나고 다시 식당으로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조용히 식사하시는데 시끄럽게 해 드려 미안합니다. 구순이 넘은 어머님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당신이 잘 안 들리니까 같은 말씀을 계속하시네요. 제가 오늘 어머님을 뵙고 왔는데, 잘 갔느냐? 길은 괜찮더냐? 춥게 다니지 말라... 뭐 이런 말씀이신데... 여러분들에겐 민폐인줄 알면서도 어머니보다 먼저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네요. 미안합니다” 칠순의 아들은 식당 안에 있는 손님들을 향해 이렇게 자기 고백을 했다. 손님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아~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라며 그의 고백에 고개를 끄떡였다. 잠시 불편했던 식당 안은 금세 온기로 채워졌고, 테이블 마다 같은 주제가 밥상 위에 올려졌다. 지금 당장은 남의 이야기 같지만 곧 자신들이 맞닥뜨리게 될 환경임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나는 식사를 다 마치고 나오면서까지 어머니의 말씀을 끝까지 경청하려던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서로 느끼는 늙음을 서로 인정하고, 서로 공감하며, 서로의 모습을 귀히 여기는 두 사람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친정아버지 청각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평소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누구를 만나든 경우가 밝으신 분인데 가끔 동문서답을 하실 때가 있었다. 혹여 자존심에 균열이 생길까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아버지! 어느 쪽이 잘 안 들리세요?” 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정색을 하시며 다 괜찮다고 하신다. 다시 여쭈었다. “아버지!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나 청각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 쪽이 더 안 들리세요?” 라고 재차 물었더니 아버지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리곤 “사실은 한쪽이 잘 안 들려. 꽤 오래되었어. 그렇지만 아직 보청기를 사용하고 싶진 않아. 주변에 보청기 사용하는 친구들이 좀 있는데 긍정적 효과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래서 난 그냥 살려고...” 잘 못 들으면 실수 할 수 있으니 대안을 찾아보자고 했더니 “대안은 보청기를 사용하는 것일 텐데 아직은 나 스스로 대단히 불편하다고 생각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실수를 줄이려면 내가 말을 덜 하면 돼. 눈은 아직 멀쩡하니 사는데 큰 지장도 없고... 너의 걱정은 알겠는데 나중에 필요하면 내가 먼저 말할게. 그리고 오랜 세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살았으니 이젠 좀 휴식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신의 배려가 아니겠나 싶다” 라고... 아버지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당신 자신도 청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주변사람들로부터 정보를 구했던 것이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 도중 먼저 전화를 끊을 때도 있었고, 같은 말을 반복하실 때면 부적절하게 응대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이해가 쉬운 언어선택과 말의 속도에도 신중하지 못했다. 여든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는 아버지는 우리 사회가 걱정하는 노인의 범주와는 아직도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인복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복지는 공급자 중심이 아닌 수급자 중심이여야 한다”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정작 가장 가까운 노인을 방임(放任)했구나 싶어, 잠 못 이루는 밤 내 안의 나를 다시금 단속한다. 그리고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옮긴다.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마음가짐을 바꾸면 인생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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