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원주이야기] 신(神)의 걸작 지광국사현묘탑의 귀향은 일제 잔재 청산
[김대중의 원주이야기] 신(神)의 걸작 지광국사현묘탑의 귀향은 일제 잔재 청산
  • 김대중
  • 승인 2019.03.11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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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언론인)

고려는 한류 문화의 원조이다. 우리 조상들중 문화 예술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나라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 예술을 해외에 알렸으며 우리 민족의 저력을 각인시켰다.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더 일찍 문화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고 발전시켰다.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고려시대 나전칠기와 상감청자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1천년전의 일들이다. 그중 또 하나의 신()의 한 수가 지광국사현묘탑이다. 고려 국사 해린(984~1070) 스님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현존 돌탑 가운데 가장 우수한 걸작으로 꼽힌다. 인간의 솜씨 인지, 신의 솜씨 인지 정말 혼란스럽다. 천년전에 도구도 특별한 게 없을 때인데 어떻게 그런 섬세한 조각품이 나올 수 있었는지 정말 경이 그 자체다. 돌 위에 구름이나 꽃잎 같은 문양들을 그토록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새겨 넣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림보다도 더 그림같다. 모두가 경탄을 보내고 최고로 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민족의 문화예술적 품격을 상징하는 지광국사현묘탑.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에도 비교할 수 없는 세계적 걸작. 세계 돌탑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명품이다.

그러나 화려한 명성과 영광은 백년전 하루 아침에 참담한 비극으로 바뀐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운명과 하나가 된다. 그 운명의 상징처럼 된다. 우리 땅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병합돼 나라가 사라진 이듬해인 1911. 일본인들이 강탈해가면서부터 시작된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탓이다. 나라 잃은 설움과 아픔을 이 땅의 한민족과 함께 했다.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서울 곳곳에서 이전과 해체를 8차례 반복했다. 해방후 한국전쟁때는 박격포에 맞아 12천 조각이 났다.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그대로 겪었다. 지광국사현묘탑의 운명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운명이고 역사이다. 고향도 찾지 못하고 비극적 유랑생활을 하다 지난 2016년 시작된 문화재청의 복원 작업중이다. 세계적 걸작이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상징인 지광국사현묘탑이 100년만에 귀향한다.

문화재청은 최근 지광국사현묘탑의 귀향을 결정했다. 원래의 자리인 국보 59호 지광국사현묘탑비 곁으로 가느냐. 아니면 별도로 법천사지 전시관을 짓고 그 안으로 가느냐만 남았다. 자리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흔적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태어난 자리였으면 좋겠다. 지반도 튼튼하게 하고 비바람을 막아 줄 수 있게 시설을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천년의 고향을 강제로 쫒겨나 백년간을 갖은 고초와 수모를 겪은 지광국사현묘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춰야 되지 않겠는가. 무슨 염치로 왈가불가 할 자격이 있는가. 천년을 지켰던 그 자리에 그대로 되돌려 놓는 것이야 말로 일제의 잔재를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천년의 자리로 귀향시키는 일에 우리는 총력을 다해야 한다. 그게 백년의 비극을 온 몸으로 버텨낸 지광국사현묘탑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도리다. 전쟁에 져서 항복한 것도 아니고 멀쩡한 나라를 통째로 팔아 넘긴 어처구니 없는 조상을 둔 우리의 일말의 양심이다. 또한 어느 이름없는 석공인지는 모르지만 신도 부러워할 천재적 솜씨의 장인에 대한 예의다.

1070~1085년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에 세워진 지광국사현묘탑. 오욕과 수난의 100년에 대한 마침표가 다가 온다. 천년의 고향에서 화려한 영화와 함께 고려의 자존심을 되찾는 새로운 천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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