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봉산천 르네상스를 위한 출발점 도시재생
[문화칼럼] 봉산천 르네상스를 위한 출발점 도시재생
  • 전영철
  • 승인 2019.03.11 06: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영철[상지영서대 교수]

지금으로부터 1,341년 전인 서기 678년 원주는 통일신라 5소경중 하나인 북원경이 있었던 고대도시이다. 북원경의 중심지는 원주천 건너편 봉산동일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우물이 나던 곳을 중심으로 우물시장이 존재했고 당간지주는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던 유일한 근거로 남아있다. 원주천에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강변마을의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에는 조선여류성리학자 임윤지당이 19세에 청주에서 시집와 평생 이곳에서 살면서 학문적인 위업을 달성한 곳이기도 하다. 근대에 와서는 민긍호의병장이 의병활동을 하다 사후에 묻힌 묘소가 뒷산 봉산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1926년에는 123년의 역사를 가진 원주초교가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조선의 신여성으로 알려진 사의찬미의 윤심덕이 초임교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봉산의 이름은 봉황의 산으로 19193.1만세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대한민국 10대 최규하 전 대통령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사후 평가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19809개월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던 비운의 대통령이다. 이 시기에 민주화운동과 협동조합운동 그리고 한 살림의 생명사상을 주창하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생가가 있어 원주의 역사를 알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현대화 과정에서 교육청이 있다 이전하고 그 자리에 도서관이 자리잡았고, 경찰서, 세무서, 선거관리위원회 등이 위치하여 교육과 행정의 중심이었지만 1986년부터 시작된 택지개발과 신도시개발 영향으로 경찰서만 남겨두고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이전하여 지역의 쇠퇴가 빠르게 진행되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또한 20년 이상 된 건축물이 73.8%, 65세 이상의 노령인구가 32.2%를 차지해 활기를 잃은 현실이다. 일제는 봉산동의 뒷산 봉산을 봉황새의 꼬리부분의 혈에 쇠말뚝을 박아 봉황이 날지 못하게 하기 위해 봉살뫼로 불렀다 한다.

봉산동 지역주민들은 과거 마포나루에서 소금배가 올라왔다는 배말의 지명을 지금도 이야기하고 계신다. 중앙선 철길의 새벽기차가 잠을 깨우던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 길은 치악산 바람숲길이 조성되어 뉴욕의 하이라인 철길공원 부럽지 않은 명소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시민들과 방문객들은 이 길을 따라 행구수변공원이나 혁신도시 반곡역까지 산책을 즐기거나 치악산 둘레길 까지 걸어가거나 지금의 원주역까지 원주천을 건너 시내로 나올 것이다.

 

소금 배 대신 자전거를 타면 서울까지 가고 낙동강 강어귀 둑까지 갈수 있는 이곳에 도시재생 사업이 지역주민과 힘을 합쳐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봉산천의 르네상스는 다시 펼쳐질 것이다.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 공터에 의자를 놓고 앉으셔서 이웃 간의 정을 나눈다. 집 앞에는 화분을 내놓아 삶의 여유를 즐기는 곳이다. 봉산동을 지나는 원주천을 봉산천으로 불렀던 시기에 빨래터엔 겨울철에도 따뜻한 온천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따뜻한 온기가 항상 넘치는 이곳에 주건환경 정비와 어르신 돌봄의 편의시설이 확충되고 자연 친화형 마을 만들기 사업이 이루어지면 청년이 찾아오고 외지의 방문객들도 이곳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고대도시부터 근·현대까지 원주의 핵심공간이었지만 불과 40여 년 동안 쇠퇴일로를 겪었던 이곳이 다시금 도시 속의 녹색도시로 태어난다면 다시금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나는 곳이 될 것이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올해 봉산천 르네상스의 길을 열어줄 도시재생뉴딜사업의 봉산동의 선정을 기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