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108년 만에 돌아 올 지광국사탑을 기다리며
[문화칼럼] 108년 만에 돌아 올 지광국사탑을 기다리며
  • 전영철
  • 승인 2019.06.3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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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철 [한국지역창생연구소장, 관광학박사]
△전영철 [한국지역창생연구소장, 관광학박사]

부론 남한강 옆 법천사지 터는 언제나 단아한 모습 그대로이다. 신라 말 8세기에 지어졌다는 법천사는 지금은 절터만 남은 굉장히 큰 절집으로 고려시대 중창을 해 고려왕실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성까지 한강 물줄기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상은 결코 상상이 아닌 현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는 지광(智光)이 초년(初年)에 수학하고 은퇴하여 머물다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이 시기가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유방선(柳方善)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으며,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등의 학자들이 여기 모여 시를 읊고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법천(法泉)리는 법문이 샘처럼 솟았다는 뜻으로 얼마만큼 절집터로서 명당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지금도 절터에는 금당(金堂) 터의 북쪽인 탑비전지(塔碑殿址)1086년 건립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 불상광배(佛像光背), 불두(佛頭), 연화문대석(蓮華紋臺石), 용두(龍頭), 석탑재(石塔材) 등이 있고 절터 남쪽으로는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지금같이 절터가 복원되기 전에는 마을 입구에 있는 집의 마루를 오르는 디딤돌로 쓰였을 만큼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탑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이유로 국보 101호로 지정되었다. 원주 법천사지에 탑비와 나란히 있었던 이 탑이 110년간 제자리를 떠나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제 초기 오사카까지 건너갔다 돌아왔지만 경복궁 한편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포탄공격으로 부서졌다가 복원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2015년 전면해체를 통한 복원을 결정하였고 원주 지역사회의 1985년부터 있었던 제자리 찾기 운동을 통해 원주로 돌아올 수 있다.

삼성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은 이 탑의 가치를 알고 용인 에버랜드 뒤쪽에 조성한 호암미술관 한켠에 이 탑을 복제한 탑을 조성하기도 할 정도로 이 탑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이러한 탑이 원주로 돌아온다. 물론 어떤 형태로 제자리에 돌아와 자리 잡을지는 지금 현재 면밀한 검토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1만세운동 100주기 뜻 깊은 시기에 지광국사 현묘탑이 돌아온다. 이는 강원감영 복원에 이어 찬란했던 남한강변에 꽃피웠던 불교문화의 르네상스를 예감케 한다. 이미 혁신도시 건설 시에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물과 다양한 유물의 발견은 원주라는 땅의 역사적 깊이와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오죽했으면 박경리작가는 원주(原州)를 근본의 땅이라 하고 내가 원주를 사랑하는 것은 산천을 사랑한다고 했을까 싶다. 천년의 세월동안 같이 있다 잠시 110년간 떠나갔었던 지광국사현묘탑이 돌아온다. 많은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지광국사 현묘탑 그 동안 많은 분들이 환수운동에 힘쓴 결과 우리는 고맙게 소중한 우리의 보물을 가까이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다시 돌아온 우리의 국보에 대한 예의는 자주 찾아서 안부를 묻는 일일 것이다. 사는 것이 힘들 때 유장한 물줄기인 남한강도 보고 찬란한 우리의 문화재도 볼수 있는 남한강가로의 여행이 벌써부터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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