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만큼 이름에 관한 임펙트 있는 에피소드가 많은 사람이 있을까. 얼마전 한 커피숍에서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아직도 나의 뇌리 한 귀퉁이에 철썩 붙어있다. “아 글쎄, 규정, 규정, 왜 규정만 강조하는지”. 어떤 사례를 거론하며 융통성 없는 행태에 직격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규정(規定)은 ‘규칙으로 정한다’란 뜻이다. 내 이름은 ‘곧은 것을 헤아린다’라는 뜻의 규정(揆貞)이므로 의미는 다르지만, 설핏 비슷하게도 들린다.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는 요즘 같은 세상에 내 이름을 거론되는 것을 자주 접하다 보면 긍정과 부정의 생각이 교차한다. 과거 일간지 법조 출입기자 시절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규정에 의하여”, “규정에 따라” ,“규정했다” 등등. 법원 판결문은 물론 행정기관의 공문, 사기업 공문에도 내 이름은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한다. 그 때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이름이 너무 사무적이고 딱딱해”, “사고의 유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집불통의 인간으로 비춰지고 있어...” 한가경 미즈아가행복작명연구원장은 한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란 평생을 함께하며 앞날을 윤택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인생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신생아 이름이건 상호 작명이건 타고난 자신의 몸, 자신의 체질, 자신의 외모, 자신의 성품과 잘 어울리고 자신의 사주와 운명을 보완해주는 이름이 좋은 이름이다”라고.
요즘 나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 태평양 같이 먼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를 품평하는 말을 지인들을 통해 자주 전해 듣는다. ‘냉혈한(冷血漢)’, ‘앞뒤로 꽉 막힌 00’란 말에서는 절로 피식 웃음이 번진다. 그러나 ‘저 놈 피는 차가울 거야’, ‘시베리아 벌판 같은 놈’ 이런 악평을 들을 때는 모골이 섬뜩해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이런 노골적인 비아냥이 나오는 것은 아마 너무 원칙을 강조하고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성격 탓 일게다. 그래서 스스로를 되돌아 본다. “내가 변해야 할까”, “나에게 진짜 문제가 있는 걸까”, “함께 사는 세상인데...”이런 생각에 고민의 깊이가 더해진다. 이 대목에서 집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떠오른다. “남자가 눈물이 왜 그렇게 많은지...”. 잔잔한 가족애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가족들에게 들킬까봐 몰래 눈물을 훔치자, 옆에 있던 집사람이 핀잔을 줬던 것. 집사람과 딸 아이는 깔깔대며 가볍게 넘겼지만, 나의 이런 모습에 집사람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부모님이 물려 주신 이름 석자는 운명이고 필연이다. 내가 걷는 길이 바른 길이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 내 직업이 사회를 밝게 비추는 ‘탐조등 역할’이니 만큼 그냥 “내 스타일 대로 살면되지”라고 되뇌고 또 되뇐다. 골수에 박힌 DNA는 누가 뭐라 한들 고치기 힘들다. 억지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거나 말과 행동이 생각과 어깃장이 나게 되면, 인생행로는 헝클어질 수 밖에 없고, 결국 고통스런 삶이 될 수 있다. ‘트럼프, 거래의 기술’이란 책에 이런 글귀가 있다. “좋은 평판은 나쁜 평판보다 낫다. 그러나 나쁜 평판은 평판이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 순간의 어떤 평판보다 내 성향이 발효와 숙성과정을 거쳐 주위에 어떻게 장기적인 평판을 받게 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내 이름석자 평가는 훗날의 일이다. “이름이 좋아 불로초라”라는 속담은 ‘불로초는 이름도 좋지만, 약효도 좋아 불로초라 이른다’는 뜻이다. 내용에 걸맞게 이름을 지은 경우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다. 그냥, 규정답게 살겠다. “내가 없어도 너는 계속 남으니...그 이름! 먹칠하지 않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