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나도 기레기 일까?
〔비로봉에서〕나도 기레기 일까?
  • 심규정
  • 승인 2019.09.09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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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심규정(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요즘 기레기란 말이 자주 거론된다. 수준 낮은 기사를 쓰는 기자를 비하하는 의미로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다. 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기자회견을 위한  국회사용과 관련, 한 방송사 기자의 질문공세가 이어지자, 발끈하며 “이러니까 기레기란 소리를 듣는 거죠”라고 쏘아 붙였던 것이다. 집권 ‘여당의 입’인 대변인이 특정언론을 빚대 이런 모욕적인 언사가 서슴없이 나도는 것은 상식 이하다. 정치쟁점에 대해 여·야가 서로 거칠고 사납게 입씨름을 벌이는 것이 일상화 된지 오래지만,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는 상황에서 국민을 대신해서 질문을 던지는 언론을 향해 혐오감과 멸시를 날린 것은 천박한 언론관을 드러낸 것이다. 해당 방송사가 과연 기레기란 말을 들을 정도로 언론의 정도를 벗어난 행동을 했는지는 차치하고, 전체 언론의 그릇된 행태를 특정방송사를 향해 내뱉었다는 점에서 야당은 물론 언론사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기레기란 말의 등장은 언론의 홍수와 직결된다.
 

SNS등장, 1인 미디어 확대, 인터넷 언론이 대거 등장하면서 미디어 스펙트럼의 다양성이라는 순기능과 함께 허위 사실과 부풀린 낚시성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린 측면이 강하다. 또 제대로 된 기자훈련 시스템에서 교육받지 못한 기자가 양산돼 스스로 자초했다는 지적도 있다. 독자,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높아졌는데, 이런 언론환경에서 기레기란 소리는 앞으로 더 자주 들을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말은 또 있다. 신레기(신문쓰레기), 찌라시, 심지어는 양아치란 비아냥을 자주 접한다. 물론 일부 언론의 그릇된 행태일 수 있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을 흐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되돌아 볼 일이다.

필자가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1991년대는 민주화 바람을 타고 신문의 복간과 창간 붐이 일었던 때라 언론사간 과열경쟁 탓에 사이비 기자들의 저급스런 민낯이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언론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이런 신조어가 자주 나오는 것은 우리 언론의 자업자득이다. 어느 순간부터 언론의 정도나 기자의 윤리를 말하면 별종 취급받는 게 현실이다. 숙련도와 전문성은 사라지고, 깊이도 얕고 논점도 모호한 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두 얼굴, 진영의 이해관계에 영합하고 스피커 노릇을 하는 등 언론이 언론답지 못한 행태를 답습해 왔기 때문이다. 옛 직장 선후배를 만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사명감은 오간 데 없다’거나 ‘우리 사회 지도적 위치에서 시민을 계도하는 한국 저널리즘 특유의 지사(志士)적 전통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파이는 한정되어 있는 데 매체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고, 경기는 침체터널에 갖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비지니스 가치를 위해 저널리즘 가치를 희생할 수 밖에 없는 언론계의 불가피한 현실일 수도 있다. 양 가치 척도로 볼 때,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공적가치를 등한시 해서는 안된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소금이 아니듯, 언론이 언론답지 못하면 존재감은 없다.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남의 허물은 겨처럼 까불어 흩어버리면서 자기의 허물은 투전꾼이 나쁜 패를 감추듯 한다’라고. 여기서 말하는 투전꾼이 나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매번 글로서 옳은 말을 하면서 뒤로는 다른 행동을 하는 언행불일치를 보이지 않았을까?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서 불의와 타협한 적은 없는가? 이 말에 나는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 해답에 따라 ‘기레기냐’, ‘아니냐’가 결정될 것 같다. 그저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기 위해 웅심장지(雄心壯志)할 뿐이다. 마치 꿀벌이 아무 갈등도 없이 묵묵히 벌집을 짓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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