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 어느 병원 이사장의 인문학 사랑
[비로봉에서] 어느 병원 이사장의 인문학 사랑
  • 심규정
  • 승인 2019.11.1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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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심규정(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단풍이 절정이다. 만산(滿山)이 이글이글 불타는 듯하다. 양장구곡(羊腸九曲)의 계곡을 따라 도도히 흐르는 쪽빛 계곡물은 가을 산수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마 다음 주부터 끝자락의 기미를 보일 것 같다. 가을은 조락(凋落)의 계절임과 동시에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색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걷이를 통해 땀의 결실을 맛본다.

원주시는 요 며칠 전 대박일지, 중박일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제대로 된 가을걷이를 해냈다. 프랑스 파리에서 날라든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선정은 원주시 역사에 오롯이 기록될 것이다. 이미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에 가입된 영국 에든버러, 아일랜드 더블린, 체코 프라하와 같은 세계 유수의 도시와 어깨를 견주게 됐다. 앞으로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기존 문화 인프라에 총천연색 콘텐츠를 입혀 문학이 찬연히 빛나는 도시로 거듭나 태어날 것이다.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집필한 도시’, 이와 맞물려 박경리 문학상 제정, 수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 낭송회, 글쓰기 대회, 그리고 그림책 도시 등이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제 원주시는 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다.

원주시가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되기 보름 전쯤인가. 절로 미소를 번지게 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성지의료재단 안재홍 이사장과 몇몇 지인이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안 이사장이 작은 쇼핑백을 참석자들에게 나눠주며 시간 날 때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 양반이 이런 면이 있네라고 되뇌며 호기심에 쇼핑백 안의 주인공을 풀어 젖혔다. 두 권의 책이었는데,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였고, 또 하나는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지은 다시 집을 순례하다였다. 이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회화, 도자, 조각, 건축 등 한국 미술의 전 영역에 걸쳐 퇴적된 작품의 아름다움을 구수한 문체로 그린 책이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이유인 즉슨 평소 내가 갈구(渴求)했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원주하면 한지의 고장이요, 옻칠기고장 아닌가. 그런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필자는 한지, 옻칠기의 조형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때가 되면, 이와 관련된 책을 구입해야 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솟구친 의욕을 안 이사장이 말끔히 해소해 주다니, 그의 관심법(?)에 놀랐고, 삶의 깊이를 알고 있는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란 생각이 들었다. 책 곳곳에는 한국다움을 간직한 작품의 특징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미()가 왜 그렇게 많은지, 나중에 필요할 때 레시피로 써먹기 위해 머릿속 기억의 창고에 꾹꾹 쟁여 넣었다. 청순미, 순정미, 세련미, 소탈미, 생활미, 주택미, 간소미, 질소미, 해학미, 곡선미, 적조미, 조화미 등 한국미가 샘솟고 있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은 이럴 때 딱 들어맞는 표현 아닐까. 책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정독(精讀)하는 내내 포만감에 사로잡혀 결국 한지공예관, 한지테마파크, 옻칠기문화관 등 돌며 작품에 눈을 붙이고 관찰하기도 했다. 이런 인문학에 대한 허기증(虛飢症) 해소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문학창의도시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원주시와 문화예술인, 관련 단체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시민 개개인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더욱 절실하다. 외형적인 치중보다는 오랜 시간 발효를 거쳐 문학 콘텐츠를 내실 있게 다져 나가야 한다. 특히나 책 읽는 도시는 전 시민적으로 더 활성화돼야 한다. 여기에 안 이사장처럼 시민들에게 인문학적 지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해 주는 양서 선물하기운동은 비록 작은 실천이지만,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빌 게이츠는 매년 생각 주간을 보내면서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에 집중했다고 한다. 누구는 좋은 책 한 권은 아이디어가 샘솟게 하는 마약과 같다고 했다. 가슴 벽 깊이 섹시한 어휘, 문장을 아로새겨 넣는다면 언젠가 불쑥 나타나 말과 글을 격조 있게 포장해서 나를 더욱 살찌게 할 수 있다. 사시사철 책 주고받기 운동을 통해 지식욕을 해소한다면 품격 높은 문학창의도시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문학창의도시라는 위상 상승의 사다리에 첫 발을 내디뎠다. 삼년지애(三年之艾)의 마음가짐으로 문학DNA를 씨줄과 날줄처럼 처럼 엮어 기념비적 업적을 남길 것으로 확신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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