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빠른 길 보다는 바른 길을 함께 갑시다
[살며 사랑하며]빠른 길 보다는 바른 길을 함께 갑시다
  • 임길자
  • 승인 2020.09.20 2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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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추석은 음력 팔월 보름을 일컫는 말로 가을의 한가운데 달이며, 또한 팔월의 한가운데 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연중 으뜸 명절이라서 가장 많은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난다. 저마다 고향을 향해 기쁜 사연 보따리를 들고 즐거운 상상에 젖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방역관련 정부 당국자들은 여전히 코로나19 재확산 우려에 고민이 많다.

오늘날 문명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는 인류 보편의 원리로 여겨진다. 국가공동체 최고규범인 우리 헌법도 이 당연한 원리를 확인해 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종교의 자유를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당하고 국가권력으로부터 차별받는 단계는 이미 오래전에 졸업했다.
그렇다고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 종교 활동이면 아무런 제약 없이 행동해도 된다는 것인가?
신앙의 자유를 외치면 그 어떠한 행동도 허용되어야 한단 말인가?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신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다수의 군중이 한자리에 모여서 대면 예배를 해야 하는가?
이는 코로나19 시대를 맞으며 우리들 스스로 서로에서 던지는 질문들이다.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고 포용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목사님들 일부가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시정잡배 대하듯 이름을 부르며 거침없이 욕설을 쏟아내는 불편한 광경을 TV를 통해 보았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제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제한과 통제 곧 인간의 본성과 잘 들어맞고 자유를 불러오도록 제약과 제한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 전 천안시에 있는 안서교회 고태진 담임목사님은 “예배를 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라고 교회 앞에 써 붙인 글을 SNS라는 통로에서 보았다.

신앙인도 국가공동체의 일원이고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그 공동체의 규범을 비켜 가서는 안 된다. 특히 사회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용인될 수 없다. 지금 시행하는 대면 예배 금지는 코로나19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예배를 다 금지하는 것도 아니다. 다수의 사람이 밀착해서 하는 대면 예배만을 금지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왜 그렇게 곤란한 것일까?

최근 3차 유행 코로나19는 70세 이상 노인 치사율을 높이고 있다. 노인복지시설은 오랜 기간 보호자 면회를 금지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에 그해 시설에 모셔진 어르신들은 잊지 않고 간간히 찾아오는 자녀들의 면회가 매일 매일을 살아있게 하는 동력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설 어르신들에게 코로나19는 가장 무서운 위협이고 폭력임을 모두가 좀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누구누구의 자식이며, 누구누구의 부모이니까.

요즘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개천절 집회가 실제로 강행된다면 정말 큰 일이다. 지난 8.15 광화문 집회 및 사랑교회 발 사태를 이미 경험을 했으니, 앞당겨 걱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알 법한 정부의 발표를 부적절한 감정으로 조작하고, 얼토당토않은 거짓으로 편집해서 유포하는 행위가 어찌하여 종교 활동이란 말인가?

이제 우리가 살 길은 빠른 길 보다는 바른길을 가야 한다. 또 혼자 달려가기 보다는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나 혼자서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순리(順理)는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따르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내 안위의 걱정보다는 우리 모두의 믿음이 기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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