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길을 나서면 그림 속에서나 만나는 꽃들이 지천에 피어 있다. 그 꽃 하나하나를 눈 속에 담다보면 내 욕심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 수 있다. 보는 것으로 부족해 꽃을 꺾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어떠랴! 한 두 송이 꺾어 텅 빈 가슴을 채울 수 있다면, 꽃도 제 아픔을 삭혀낼 것이다. 사람의 세상은 코로나19로 야단법석을 떨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아무 일 없는 듯이 꽃을 피워 놓고 여유롭기만 하다. 참으로 많은 시인들이 꽃에 대한 시를 썼다. 그 대표적인 시가 아마도 김춘수 시인의 ‘꽃’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 ‘꽃’ 全文-
원주의 모 서점 유리창에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인쇄되어 붙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타가 한 글자 있어 서점에 전화를 걸어 오타를 말해주니 주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오타는 몇 년이 되도록 고치는 일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꽃을 읽고 그 오타를 발견해 줄까? 라는 마음을 갖고 고치지 않을 것이라 이해하면서 나는 오고 가며 그 시를 읽는다.
꽃들은 아무리 똑같은 꽃을 피워도 비슷하다거나 흉하다거나 보기 싫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꽃이 갖는 아름다움은 제 목숨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낸다는 것이다. 꽃마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다 갖고 있다. 특히 늦가을에 피는 꽃들은 낮과 밤의 온도교차가 크기 때문에 꽃잎의 색깔이 더 선명하고 곱다. 무서리 내린 시간을 견뎌낸 시간만큼 아름다움도 다른 계절의 꽃잎들보다 매혹적이고 숭고하다. 구절초, 쑥부쟁이, 들국화… 들에 핀 꽃잎들이 말해준다.
나태주 시인이 몇 년 전 친필로 시집 앞장에 써서 준 ‘들꽃’이란 시를 읽어 본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산기슭을 따라 산길을 걷다보면 참으로 많은 들꽃을 만난다. 가만히 앉아 그 꽃들을 자세히 바라본다. 그리고 오래 바라본다. 꽃잎 하나하나 그 모양이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향기를 담고 있는 깊이가 하늘의 깊이를 다 담아 놓은 듯 향기롭다.
내가 어릴 때 자주 읽던 시인들의 시들은 김소월, 박용래, 한성기, 한용운 등과 같은 시인들의 시였다. 시조를 쓰면서 김어수, 이태극, 정완영, 서벌, 등의 작품을 읽었다. 모두 나에게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나를 가르친 고 김환식 선생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의 필사본이 제 키를 넘으면 좋은 시를 쓸 영양분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줬다. 이 가을, 들에 핀 꽃들도 꽃 한 송이 피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제 마음의 시간을 다독여 왔겠는가 싶다. 꽃은 하루 이틀에 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한 계절을 땅에 뿌리박고 세상의 모든 시련을 이겨내야만 꽃을 피워낸다.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서’도 잠 안 오는 새벽에 국화꽃에 내린 무서리를 보며 썼다고 전해진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다 보다.> ‘국화’ 꽃 하면 서정주를 꼽고, ‘해바라기’ 꽃 하면 함형수을 꼽고, ‘갈대’ 하면 신경림 시인을 나는 꼽는다. 산의 나무가 아무리 많아도 발밑 꽃 한 송이를 더 아름답게 바라보는 이유는 때가 지나면 꽃은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을, 층층 마음의 계단처럼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하늘의 높이를 재보는 일도 행복의 하나라 생각하여 들꽃이 지기 전에 꽃구경을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세히 오래 바라보면 거기 지난 계절의 발자국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