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민창홍 作 / 김치처럼
[시가 있는 아침]민창홍 作 / 김치처럼
  • 임영석
  • 승인 2020.11.0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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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처럼

-민창홍 作

 

인삼 닮은 무를 다듬는다
미움의 털 잘라낸다
벌레가 갉아 먹은 마음까지도 떼어내고
공평하게 네 동가리로 나누는 칼날
하얀 속살 묻어난다
검은 응어리로 가득한
때 씻고 또 씻으며
보얗게 살아나는 무를 본다
언젠가 나도 무색의 시간이 있었지
살아서 팔팔하던 패기 억누르던 소금
나이에 걸맞게 숨을 고른다
찰기 넘친 쌀알들 으깨져
비명 지르는 둥근 양푼 속
찐득하고 부드러운 풀기
한 세상 늘어질 시간쯤
고춧가루 새우젓 마늘 생강 으깨어
하얀 무와 푸른 무청 범벅이 되면
잘 생긴 총각들 당당하게 세상을 걸어간다
베란다에서 곰삭아 가는 묵은 항아리
하루 한 번쯤 조바심 나게 얼굴을 내미는 햇빛에
미움을 꾹꾹 다져 넣고
미칠 듯이 답답한 응어리진 시간들
무같이 마음을 눅이며
아린 생강 맛처럼
곱씹어가는 내 삶

 

민창홍 시집 ‘닭과 코스모스’, ‘황금알’에서

세상의 변화가 10년이면 강산이 바뀌는 게 아니라 강산이 사라지는 형국이다. 세상의 변화가 그만큼 빠르고, 의식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남자들은 부엌 출입도 생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부모님 헛기침 한 번이면 그 어떤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뜻을 따랐다. 민창홍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재가 공존하는 듯하면서도 현실에서는 통째로 현재의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읽어보는 시 ‘김치처럼’도​ 세상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잘 섞어 살아가야 함을 느끼게 하지만, 요즘 세상은 김치 맛처럼 맛들어 살아가는 세상은 아니다. 김치는 주류가 아닌 격식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반찬일 뿐이다. 김치를 굳이 반찬이라 생각하는 세대는 베이비 붐 전후의 세대까지의 삶에 뿌리내린 의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치 맛에 익숙하다는 것은 격동의 세상에 살았다는 증거다. 김치는 어느 한 가지의 맛이 아니라 모든 식재료의 요동치는 몸부림에서 태어나는 맛이다. 무, 배추의 맛으로 결부되지만, 나머지 양념들의 희생이 세상 속으로 감추어진 맛이다. 그게 우리들의 근대사가 아닌가 생각을 하며 읽으니 또 다른 감칠맛이 나는 시다.

임영석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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