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 고독이란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
[비로봉에서] 고독이란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
  • 심규정
  • 승인 2020.11.08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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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 [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심규정 [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새벽 어스름이 걷힐 무렵, 집 앞 수변공원에서 산책에 나선 나를 반기는 무리가 있다. 길고양이 들이다. 때론 한 쌍, 때론 홀로, 새끼부터 배불뚝이 몸집까지,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길고양이의 폐해를 지적하려는군요”라고 예상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매일 집을 나설 때면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길지 궁금해진다. 내 보폭에 2m 뒤처져 꼬리를 세로로 쭉 뻗은 상태에서 계속 따라오거나, 나를 저만치 앞서더니 이내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 몸을 좌우로 흔들며 응석을 부리거나, 하천 한가운데를 마치 무대 삼아 그르렁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귀에는 아기 울음을 연상시키지만.

한 번은 녀석이 하도 귀여워 걸음을 멈춘 채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지만, “그러다 정들면 어떻게 하냐”라는 집사람의 핀잔에 다시 좁은 걸음나비를 이어갔다. 녀석이 자꾸 눈에 밟혀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그 자리에서 애처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전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딸아이는 산책로에서 만난 길고양이 사진을 보여주며 집에서 키우고 싶다고 어리광섞인 투정을 부렸다. 집사람과 필자가 봤던 바로 그, 하얀 장화를 신은 듯한 검정털 고양이였다. 우연의 일치지만 이쯤 되면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반려견, 반려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원주시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지난 6일 현재 동물등록제에 따라 등록된 반려견은 19,441마리로 지난해말 12,916마리보다 33.5%(6,526마리)증가했다. 반려묘는 반려견처럼 동물등록제가 필수가 아닌 선택이지만 129마리로 지난해 말 97마리 보다 늘었다. 반려동물을 슬링백, 백팩에 담아 걷는가 하면 유모차에 태우고 거리를 활보하는 애견인, 애묘인의 모습도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됐다.

어느덧 중년(55)에 접어든 필자는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누렁이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서 누렁이를 꼭 껴안고 잤다. 까까머리에 누렁이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을 방금 뽑아낸 컬러사진처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개 사랑은 나이가 들면서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관리적인 측면, 건강상의 이유 등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다. 애완동물을 마치 가족 대하듯 금지옥엽하는 사람들을 보면 혀를 끌끌 차며 미간을 찌푸린 적도있다.

그런데 지금은 변했다. 인터넷 포털 애완견 입양 사이트를 서치하고, 전문가들에게 특정 애완견의 장·단점은 묻고, 삽살개를 키워볼까? 풍산개는? 시바견은? 수차례 자문해 봤다. 얼마 전 집사람에게 애완견이나 애완묘를 입양하겠다고 했으나 얼음장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갓난 아이 키우는 것처럼 손이 많이 가는데, 어떻게 케어하려고 하냐”라는 근심어린 말투였다.

찰나의 순간 이런 생각이 뇌리를 깊이 파고들었다. 내가 왜 강아지, 고양이에 집착할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군 제대 후 복학해서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 한창 대입 준비에 바쁜 고교생 딸, 어느새 훌쩍 자란 자식이 나로부터 서서히 밀물처럼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밀즈대학교의 린 화이트 박사가 “20세기에 가장 유행하는 질병은 고독이다”라고 말했듯이 지금 고독의 덩어리, 고뇌의 짐이 나로하여금 마음 편한 동반자를 찾게끔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한 후배로부터 귀가 솔깃한 말을 전해 들었다. 각자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대화가 점점 단절되고 삭막했던 한 가족. 유리가족 이랄까. 이런 가족이 애완견을 입양하고 나서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것.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된 관심사가 되면서 서서히 집안에 웃음꽃이 번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애완견, 애완 묘가 우리 인간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사고하고, 인생의 굴곡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어엿한 가족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이른 새벽의 여명 속에서 나는 걷는다. 며칠 전 개구리를 갖고 장난을 치던 새끼 고양이를 만났으면 좋겠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는 아니지만, 이렇게 꾸짖고 싶다. “작은 아이를 못살게 굴면 안 된단다. 너는 장난치는 거지만, 개구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니” 말 잘 들으면서 때론 까탈부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일상을 되찾는 나를 닮은 애완동물을 가족으로 맞을 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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