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왜 우냐 묻는 사람이 고맙다
-조명희 作
아침에 먹는 라면이 슬퍼요
라는 말을 들은 후 시계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몇 시까지를 아침이라고 단정해야 할까
열두 시를 넘긴 시간이라 아침은 아니라며 가스 불을 켠다
물을 붓는다
밤낮이 따로 없어 적당량은 없고
라면을 귀한 손님상에나 올렸다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의 꼰대는 밤새 마누라에게 꼬집힌 옆구리를 드러내며 나왔다
물 반 면 반의 불어 터진 하면처럼 배불뚝이 꼰대의 허풍도 자고 나면 부푼다
달걀을 깨뜨리던 숟가락을 눈두덩에 댄다
캄캄해서 뵈는 게 없다
거짓말처럼 눈물에서 수프 냄새가 났다
충혈된 눈에서 새빨간 말이 흘렀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을 보고도 나에게 메말랐다나 뭐라나
때로는 왜 우냐 묻는 사람이 고맙다
오늘이 어제와 동갑이어서 좋은 것처럼
조명희 시집 ‘껌 좀 씹을까’, ‘한국문연’에서
조명희 시인의 시 ‘때로는 왜 우냐 묻는 사람이 고맙다’를 읽으면서 우리가 내 이웃과 벗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생각하고 사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전화번호가 전화기에 저장이 되어 있지만 과연 몇 명이나 전화 통화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뜬금없이 전화하면 아쉬운 부탁이나 하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해가 바뀌고 카톡으로 새해 인사나 카톡 카톡 보내는 그런 사이는 아닌지 나 스스로를 뒤돌아본다. 세상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상처럼 보여도 사방 꽉 막힌 방에서 홀로 울고 있는 이가 수없이 많다. 밥 한 끼 달라고 하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죽어간 작가도 있고, 라면 하나, 아이 분유 한 통 훔친 게 몇백억 사기꾼보다 엄한 처벌을 받는 모습도 종종 뉴스에 나온다. 울고 싶을 때, 서러울 때, 등 토닥토닥 두드리며 왜 우느냐고 말 걸어주는 이만 있어도 세상은 따뜻할 것이다. 두 손 꼭 잡아주며 그래 이 순간만 넘기면 잘 될 거야 힘내자 응원해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극단적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어제와 동갑이어서 좋은, 아무 변화가 없고, 아무 발전이 없는 무능함을 어떻게 벗어나지 못하는, 몇 시까지가 아침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의 울음을 들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뜨겁게 물어보다, 왜 우느냐? 울어 가슴 시원하다면 울어야 한다고 말해 주자.
임영석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