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자막들]추억의 앨범…원주역, 그리고 기찻길
[세상의 자막들]추억의 앨범…원주역, 그리고 기찻길
  • 임영석
  • 승인 2021.01.31 2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영석 [시인]
△임영석 [시인]

얼마 전 원주역이 무실동으로 새롭게 이전을 하며 8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원주역은 과거 속에서 기억해야만 하는 역이 되었다. 필자만 해도 서울을 갈 때 원주역에서 표를 끊어 청량리를 마지막으로 오고 간 것이 2020년 10월이다. 새롭게 문을 연 무실동 원주역에서는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이용해 본 일이 아직은 없다. 원주역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그런 추억들이 많다. 늦은 밤 원주역을 막 내리면 원주역 작은 광장은 각자 자신의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나려는 사람들이 택시를 타기 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며, 또 사창가 아가씨들이 붉은 조명 아래 서서 지나가는 뭇 남성들을 유혹하는 모습도 한 풍경이라면 풍경일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서울에서 다정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 잔을 하고 나면, 그만 졸다가 원주역을 지나쳐 내리지 못하고 제천역까지 마중을 나오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서재에서 살구뚝마을을 지나가는 기적 소리는 잘 있냐고 묻는 안부 인사 같은 그리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안개가 짙게 낀 날은 기적소리도 더 길게 붕!~붕!~ 거리며 내뱉었고, 가을 달빛이 밝게 뜬 날에는 기적 소리도 짧게 붕!~ 하며 지나쳐 가는 것만 같았다. 치악산 산허리를 뚫고 가는 기차는 가을 단풍을 옮겨 싣고 희망의 나라로 떠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치악산 단풍잎을 실어 나르던 덜컹거리던 기차는 언제 다시 달려갈지 기약이 없다. 

며칠 전, 기차가 다니지 않는 행구동 기찻길을 걸어 보았다. 이 기찻길을 무단 침입해 걸으면 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문구며, 오라 가라 수없는 신호를 보냈던 신호등도 전기가 꺼져 반짝거렸던 눈들을 모두 감고 있었다. 그리고 막중한 기차의 무게를 감당하며 제 역할에 스스로 눈부실 만큼 반짝거렸던 선로는 채 한 달도 안 되어 붉은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세상을 원망하는 피눈물처럼 반짝거렸던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 이따금 / 완행열차가 어지럽게 기적을 울리며 / 지나 간다. // 눈이 오고 / 비가 오고… // 아득한 선로위에 / 없는 듯 / 있는 듯 /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한성기 시 「역」 전문

이 기찻길 양옆에 봄이면 개나리꽃이 변함없이 필 것이다. 그 개나리꽃을 반갑다고 흔들며 지나갔던 수많은 기차들의 바퀴 소리도 뿌리에 녹여 새로운 소식으로 만들어 냈을 것이다. 선로에 깔린 작은 자갈들의 숫자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지나갔을 것이다. 기찻길 옆에 살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차가 무사히 지나가던 것을 듣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는 무사히 안전하게 기차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짐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슴속에 덜커덩 거렸던 기차소리는 내려놓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청춘 남녀는 기찻길이 지그재그 돌고 돌아 기차의 속도가 늦고 늦더라도 기차의 속도를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곧게 쭉 펴서 새롭고 빠르게 달리는 기차도 새로운 낭만을 품어 내겠지만, 그간 80여 년 원주의 희로애락을 품고 품어 달렸던 봉산동 철다리, 그리고 봉산동 성당 종소리마저 마저 싣고 떠났던 기차도 있었을 것이다. 치악산 산허리 바위를 뚫어야 했던 아픈 역사의 진실도 이제는 가슴에만 남기고 뒤돌아보아야 한다. 더 이상 기차는 길의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그 기차소리는 이제 허공에 깊은 여운으로만 남았다.

옛 기찻길이 우리들 삶의 시간을 뒤돌아보는 아름다운 삶의 시간을 운반해 주었다면, 그 추억의 기찻길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달리는 꿈의 기차가 달릴 것으로 나는 믿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