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자막들]인연(因緣)
[세상의 자막들]인연(因緣)
  • 임영석
  • 승인 2021.04.04 2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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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석 [시인]
△임영석 [시인]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인연이라는 것이 없다면 빙하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는 과거의 시간처럼 막막하게 보일 것이다. 인연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꽃이 피고, 새들이 날고, 구름이 몰려와 눈과 비를 내리게 하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게 한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인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인연이 얼마나 가깝게 맺어져 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누군가는 신발을 만들고, 누군가는 옷을 만들고, 누군가는 화장품을 만들고, 누군가는 자동차를 만들고, 누군가는 식료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쉽고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들에 피는 꽃들, 산에 있는 나무들, 물속에 살아가는 물고기, 어둠 속에 빛나는 별들이 모두 우리가 인연으로 만나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내가 살아오기까지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쳐 왔다. 어느 사람은 횡단보도에서 몇 초의 눈빛을 마주하고 지나쳐 갔을 것이고, 어느 사람은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누었고, 어느 사람은 함께 기차를 타고 앞자리에 앉아 같은 방향의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사람만 인연이라고 믿는다. 마치 나뭇가지에 맺혀 있던 나뭇잎은 생각지도 하지 않고 나이테처럼 굳어져 있는 모습들만 삶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봤더라 / 어디서 봤더라 / 오 그래, / 내 젖은 눈 속 저 멀리 / 언덕도 넘어서 / 달빛들이 / 조심조심 하관下棺하듯 손아귀를 풀어 / 내려놓은 / 그 길가에서 / 오 그래, / 거기에서 // 파꽃이 피듯 / 파꽃이 피듯

▲장석남 시 「인연」 전문

나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에게 시를 전하고 인연을 맺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 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면식도 없다. 이 세상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살아있는 행구동 느티나무를 누가 심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그 천년의 세월을 보듬고 지켜보고 내 마음 한가운데 천년 세월의 호흡을 불어넣기 위해 찾아간다. 인연이란 이렇게 내 마음속에 깊은 삶의 호흡을 불어 넣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매일 방송과 신문, 인터넷 뉴스들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믿음이 실종된 세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 같은 것들이다. 다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세월이 흘렀다는 나이테 하나를 남기고 새잎을 피워 스스로의 모습을 지워낸다. 지옥(地獄)이란 말이 왜 나왔겠는가 생각을 해 본다. 인연보다는 악연을 맺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말이라고 본다. 죄를 짓거나, 약한 것들을 괴롭히는 일을 삼가라는 말이다. 스스로가 힘 있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호랑이도 죽으면 그 살과 뼈를 먹는 것은 구더기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균들이다. 이 세상 강한 것이 있다면 그 인연을 잘 다스려 살아가는 것이고, 약한 것이 있다면 악연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천적은 악연처럼 보이지만 가장 큰 믿음을 주는 인연이다. 미꾸라지를 살아서 옮기는 데 메기를 한 마리 넣어 둔다고 한다. 메기에게 잡혀서 먹히지 않기 위해 미꾸라지는 메기를 피해 움직이기 때문에 몇 시간을 이동해도 팔팔하다고 한다. 

인연이라는 것은 겨울나무의 찬바람 같은 것이기도 하고, 봄바람처럼 고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내게 시련을 주는 인연이라고 해서 그 인연이 괴롭고 슬프고 불행하다고 느끼겠지만,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천적이라고 한 번 더 생각을 하면 강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연이 실과 바늘 같다고 말을 하지만, 실과 바늘 같은 인연도 해진 옷을 꿰매고 흉을 가려줄 때 따뜻해지는 것이다. 행구동 천 년 느티나무를 바라보니 천년 세월의 인연이 내 눈빛을 더 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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