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 익은 풍경이되 달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 들던 그날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신한국문학전집36 『시조선집』, 《어문각》에서
잠도 깰 겸 새벽 공기를 마시러 밖에 나가보니 오늘은 유난히 달이 밝다. 내일이 보름이라 그런지 하늘 한복판에 떠 있는 달빛은 무수한 말을 삼키고서 은은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만 같다. 시를 읽고 쓴다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만달(萬月)을 품고자 하는 기나긴 세월을 살고자 하는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보름달을 만 번 바라본다는 것이 만달을 품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 세월이 833년이란 세월이 흘러야 한다. 천년 세월을 살아야 만달을 품어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틈틈 행구동 천년 느티나무 아래에서 나는 만달을 품은 느티나무의 몸을 만져본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란 이호우 시인의 시를 되뇌며 내가 바라본 보름달이 몇 번이나 되었나 생각을 하다가 무수한 사람이 저 달을 쳐다보며 스스로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며 밝아지고자 마음먹었을 것이다. 봄밤인데 늦가을 날씨처럼 차갑고 춥다. 그럼에도 꽃 핀 꽃가지마다 달빛 한 올 놓치지 않고 무엇인가 새겨들으려는 고요함이 넘친다. 꽃나무가 꽃잎을 피우려는 지극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달빛이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마음 하나를 가슴에 새기기 위해 시를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