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박태일 作 / 풀나라
[시가 있는 아침]박태일 作 / 풀나라
  • 임영석
  • 승인 2021.04.18 2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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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나라

박태일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젖쟁이 노랑쟁이 나생이 잔다꾸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파도밭을 담장으로 삼고 사는 나라

예순 아들이 여든 어머니 점심상을 차리고

예순 젊은이가 열 살 버릇대로

대소사 상다리 이고 지는 마을

사람만 봐도 개는 굼실 집 안으로 내빼

이름 잊혀진 채 그저 풀로만 불리는

강바랭이 씀바구 광대쟁이 독새기

이장 댁 한산 할배 마을 회관 마룻바닥에

소금 전 양 등줄 꺼지게 누운 마을

토광 옆 마늘 종다리는 무슨 힘으로

아침저녁 울컥벌컥 잘도 돋는데

한때 마흔 이젠 스무 집 어른들

집집 다 버리고 마을 회관 두 방

문지방 내외하며 자고 먹는 풀나라

굴 양식 뜰것이 아침마다 허옇게

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바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박태일 시집 『풀나라』, 《문학과지성사》에서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사는, 그런 동네는 하루 종일 해 뜨고 달 뜨는 것 외에 무엇이 더 궁금할까도 싶다. 세상 인연과 닿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도 힘들다. 그 인연을 밀어낸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박태일 시인의 시 「풀나라」를 읽으면서 내 삶에서 잊고 지낸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예순 아들이 여든 어머니 점심상을 차린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60을 넘긴 아들이 80을 넘긴 어머니 점심상을 차리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이 들까 싶다. 바다는 저승길이 종이꽃처럼 피고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바다는 위험하면서도 먹고살기 위해 다시 또 그 바다에 삶의 터전을 삶아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이 시집이 2002년 출간되었으니 2000년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바닷가 마을이 있을 것이다. 우리 곁에 있지만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그런 나라의 이야기이기에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라고 묻고 있다고 본다. 세상이 변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 사람 사는 마음이 변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 자신이 변해 있는데도 세상 탓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있다는 말을 꺼내 수 없을 것이다. 광대쟁이, 독새기, 바랭이풀 등이 널브러진 풀나라, 그런 풀나라는 아직도 세상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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