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심일소령 '비겁한 도망자' 주장 유감
고 심일소령 '비겁한 도망자' 주장 유감
  • 심규정
  • 승인 2016.06.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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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규정<원주신문 편집장>

영국의 해군제독이자 역사학자였던 GA밸러드(1862~1948년)는 자신이 지은 ‘바다가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1921년)에서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은 세계해전사상 일찍이 그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고 극찬했다.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산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함선 60여 척을 침몰시켜 크게 이긴 싸움이다.

밸러드는 ”이것은 위대한 조선의 제독이 세운 빛나는 전공“, ”불과 6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중략)이순신 제독이 그의 조국 밖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다“라고 이순신을 세계해전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제족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한산대첩을 일컬어 ’한국의 살라미스해전‘(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해협에서 맞아 격파한 전투.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리스 함대를 이끌었는데,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이라고 평가했다.

시곗바늘을 1950년 6.25전쟁으로 거슬러 가보자. 춘천대첩(춘천지구전투)은 낙동강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전쟁의 3대 전투로 꼽힌다. 당시 심일 소령(당시 소위)은 김기만 중사, 박태갑.홍일영.조군칠 하사, 심규호 일병 등 5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북한군의 자주포가 접근하면 수류탄을 투척, 전차를 멈추게 한 뒤 포탑에 화염병을 던져 3대의 자주포를 격파한 것으로 기록됐다.

춘천대첩은 6.25 개전 초기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맞서 학생, 경찰, 군이 혼연일체가 돼 이뤄낸 한국군 최초의 승리이자 북한의 남진을 사흘간 지연시켜 6.25 전쟁 전체의 판도를 뒤바꾼 결정적인 전투다.

육군 2군단은 매년 102보충대 심일공원에서 전승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전승재연행사까지 가질 정도로 우리 군으로서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쟁사에는 어김없이 영웅이 등장한다.

심일 소령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숭고한 희생정신 때문에 ’6.25전쟁 영웅‘, ’자주포 킬러‘ 로 불린다. 매년 6월 호국보훈의 달만 되면 그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런데 당시 1중대장이 심소령의 영웅담이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살린 칼럼이 한 중앙일간지에 실려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심 소령의 전공이 왜곡됐다면 분명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 석연치 않다.

심일 소령은 지난 1951년 위관장교로서는 최초로 군인의 최고영예인 화장무공훈장을 받았다.  당시 공적조서를 바탕으로 면밀한 심사를 통해 선정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문제를 제기한 전 주월공사는 그동안 간헐적으로 이런 주장을 제기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주장만 일을뿐 이를 입증할 증거나 다른 증언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EH카알)라는 말처럼 과거의 실체적 진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삶의 방향, 그리고 미래를 설계하게 된다. 실체적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객관적 팩트가 있는데, 왜곡을 규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훈 소령을 폄하하는 것은 실로 유감이다.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는 육군 준장출신으로 현재 91살이다. 애국심이 투철한 것으로 알려진 그가 춘천대첩의 전공을 뿌리채 흔들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은 심일소령을 추앙해온 지역사회 정서와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다.

보도를 계기로 SNS에는 이를 비난하는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자칫 전쟁영웅이 꽁무니를 뺀 도망자로 왜곡될수 있어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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