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강원인]홍일송(54) 한인회장
[글로벌 강원인]홍일송(54) 한인회장
  • 홍알벗 해외통신원
  • 승인 2014.07.05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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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과 뉴저지 지역에 한인관련 단체만 1천여개가 넘는다.
몇년전 이 원인을 분석한 어느 지역신문의 기사가 보도돼 파장을 일으켰다.
한인들은 뭉치기도 잘하지만 마음에 안 맞을 경우 따로 떨어져 나가 단체를 만드는 습성이 있다는 내용의 다소 비판적 내용의 기사였다.
그러나, 미국 주류사회 속에서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위해 수십년을 한결같이 뛰어오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강원도 춘천 출신의 홍일송(54.사진) 버지니아한인회 회장.
홍회장을 만나 이민 1.5세대로 겪었던 미국 이민생활과 단체장으로서 성과, 그리고 계획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홍일송.jpg
 
홍회장은 한인들의 권익신장과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맹렬히 뛰고 있는 인물로 한인사회에 정평이 나있다.

 
2000년부터 코암코(KoAmCo), 즉 미주한인봉사단을 결성 한인 유권자의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을 하는가 하면 일본 종군위안부 결의안이 미 연방 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활발한 캠페인을 벌였다. 

4년 전에는 버지니아주 내 모든 공립학교에서 일본해와 함께 동해 명칭을 함께 표기한 교과서만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동해병기법안' 통과를 위한 캠페인을 최초로 시작했다. 버지니아한인회장에 선출된 때였다. 

오는 11월 31일 임기가 끝나는 홍일송 회장.
 
그동안 한인사회 모두가 노력한 덕분에 이제는 미국 정치인들이 수시로 한인사회를 찾는다고 말한다. 그만큼 정치력이 많이 신장됐다는 것이다. 

선거철 때마다 한인사회를 위해 일해줄 후보를 위해 선거자금을 모으고, 한인유권자들의 표로 힘을 과시한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아도 말한다.
 
"아직도 많은 한인들이 경제력 신장에 비해 시민의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참여의식도 부족합니다.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훈수만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 한 푼 기부하지 않는 사람이 더 따지고 듭니다. 내 문제는 항상 급하지만 남 문제는 이웃이라도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홍 회장은 우리의 2세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 안창호 선생이 이민 초창기 때 펼쳤던 범동포의식과 애국심, 교육 등을 장기적 계획에 따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홍 회장은 문화재청의 산하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 미주 본부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워싱턴DC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 재매입에 앞장섰던 단체다. 

홍 회장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찾아 후손들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인회장직에서 물러나면 2세 교육을 위해 발벗고 나설 계획이다. 

홍 회장이 태어난 곳은 춘천에서도 오지인 신포리다.
 
하지만 너무 어려서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은 70년대 말 중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 가고 난 뒤였다.
 
199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한국을 찾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본인의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홍 회장은 고향집을 볼 수 없었다.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자신이 태어났던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긴 것이었다.
 
남은 것은 주소 뿐.

홍 회장이 미국에 온지도 어느덧 36년이 지났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한인 학생은 홍 회장 혼자였다. 

어떻게 적응할까 고민하다 무술 동아리를 만들었다.
 
이미 한국에서 태권도 단증을 갖고 온 유단자였다.
 
동아리 회원 모집하는 날 학교 식당에 100여명의 지원자가 모였다.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홍 회장은 무술동아리 대박사건이 이소룡 도움 덕분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영화배우 이소룡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였습니다. 제가 학교 복도를 지나갈 때면 학생들이 둘로 갈라지면서 길이 생겼었죠. 무술 동아리 회장이었으니까요." 

홍 회장은 그렇게 한국에서 온 '브루스 리'로 미국 주류사회 속에서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대학시절 중책을 맡게 된다. 

1985년 워싱턴지역 9개 대학에 다니는 우학생, 한인학생들이 모여 조직한 워싱턴한인학생회의 회장을 맡았다.
 
회원수가 2,500명에 이르는 대형 조직이었다. 

워싱턴지역 최초의 한인주소록을 만들어 배포했으며, 이런 저런 사업비로 한해동안 학생회에 책정된 예산이 1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정도 돈이면 당시 델리를 3개나 열 수 있었다고 한다. 

홍 회장이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메릴랜드에 정착할 때만 해도 워싱턴DC 수도권지역에는 한인회가 없었다고 한다.
 
미국 주류사회로의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민 1세대들은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곳에서 생존하느냐 못하느냐,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생업에만 매달려야 했다.
 
일주일 내내 하루 14시간씩 일하는건 기본이었다. 

많은 한인들이 식료품점과 식당에서 일해 돈을 벌었다.
 
그나마 주급을 못 받는 일도 허다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미국 사회는 그리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한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직장은 소형 마트 체인점인 '7/11'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일한다는 것은 첫째, 영어를 할줄 안다는 것이고, 둘째 의료보험이 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일을 더하면 초과수당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사회 진출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부모님 세대의 모습을 보고 자란 홍 회장은 결심한다.
 
미국사회에서 인정받는, 존경받는 한인사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1985년 워싱턴 한인학생회 회장을 거쳐 1986년 워싱턴한인회 회장 후보 토론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워싱턴지역 최초의 한인 공개토론회였다. 그렇게 하나 하나 모습을 만들어 나갔다. 

1987년 재미민주인권협의회 회장을 맡아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많은 단체의 대표 또는 임원을 맡았다.

홍 회장은 한국 월드컵을 잊을 수 없다.
 
2000~2002년  3년동안 월드컵 미주자원봉사단 단장을 맡았던 때였다.
 
미국에서 한인학생 278명의 언어 자원봉사자를 꾸려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의 10개 월드컵 경기장에서 통역업무로 맹활약했다. 

미국 어린이축구단도 한국으로 데리고 갔다.
 
한국 어린이 집에서 민박을 시키면서 부산과 제주도 등지에서 현지 한국 어린이들과 친선 축구시합을 가졌다.  
 
월드컵 홍보를 위해 갔지만 미국 아이들과 부모들이 한국 어린이 가족과 어울리며 한국의 문화를 배우는 소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한인사회에 일어났던 옳지못한 일을 미국 주류사회에 알리고 보편 타당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가 무엇인지 찾는 작업을 해 나갈 예정이다. 

홍 회장은 강원도민의 단결과 발전을 기원했다.
 
"월드컵 당시 내고향 강원도에 월드컵 경기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만큼 모두가 하나되어 좀 더 역동적인 강원도를 만들어 나가는데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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