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원주이야기>원주 시장(市場)의 역사와 가치
<김대중의 원주이야기>원주 시장(市場)의 역사와 가치
  • 김대중
  • 승인 2019.01.07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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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언론인>

시장(市場)의 기원은 인류의 삶과 함께 한다. 그 뿌리는 물물교환이다. 인간이 서로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데서 시작됐다. 물물교환이 특정한 장소에서 이뤄진 것이 최초의 시장이다. 화폐와 같은 거래의 수단이 등장하면서 시장은 진화를 거듭 했다. 결국엔 대형마트와 온라인 시장의 세상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시장의 진화 역사만 봐도 인류 문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인간이 살아 가는데 시장의 역할과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 지 짐작이 간다. 기록상으로 원주에 시장의 등장은 19세기 후반부터다. 당연히 원주에 사람이 살면서부터 시장이 있었지만 여기선 자료를 바탕으로만 한다. 관동읍지에 보면 읍내장, 안창장, 흥원창장, 귀래장, 주천장 등 5곳이다. 주천은 그 당시 원주에 포함돼 있었다. 이후 1919년 일제강점기때 조선총독부의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원주면의 읍내장, 건등면(1914~37년까지의 명칭)의 문막장, 부론면의 흥호장 3곳이다. 독한 일인들의 조사가 철저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자료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종합하면 원주읍내장이 열렸던 장소는 강원감영앞에서 옛 시공관 자리쪽이었다고 한다. 6. 25 한국전쟁전까지 원주시내서 유일했던 읍내장은 그렇게 섰다. 이 일대 골목을 따라 아주 왕성하게 열렸다고 한다. 그러다 전쟁이 나면서 군부대와 원주역으로부터 가까운 지금의 중앙동쪽으로 이동해 형성됐다고 한다. 한국전쟁후 원주는 시내가 온통 군인 세상이었다. 특히나 원주역과의 접근성이 좋은 학성동 태장동 우산동 쪽으로는 시내가 거의 다 군부대로 뒤덮였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획기적인 교통수단인 철도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도시발전의 축을 바꿔 놓았다. 원주는 역의 등장과 이어진 전쟁을 통해 도심 발전이 철도 교통접근성에 따라 크게 쏠리게 된 것이다. 시장의 이동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지금의 자리로 자연스레 옮겨져 형성된 중앙시장은 1953년 2월8일에 공식 설립됐다. 맨바닥에서 시장이 서던 것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탄생한 것은 1970년이다. 그옆 자유시장은 1987년에 건립됐다. 한국전쟁후 원주의 도심 발전의 중심 축 역할을 해 온 것이 중앙시장이다. 주변 미군부대를 비롯해 수많은 부대에서 흘러 나온 물자도 거래됐다. 전쟁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장이다. 더욱이 전쟁때 어느 도시보다 피해가 컸던 곳이 원주다. 성한 건물이 서너채 밖에 없을 정도로 폭격에 초토화됐던 원주시가지. 군부대서 나온 판자로 지은 소위 하꼬방 생활을 하던 원주시민들은 이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사고 팔며 그 험한 시절을 살아 넘겼다. 눈물과 웃음, 슬픔과 기쁨, 아픔과 한의 덩어리였다. 원주시민의 삶에 대한 에너지원이 되었고 희망이었다. 그러면서 원주는 성장했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엊그제 중앙시장에 큰 불이 났다.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이튿날에는 전통시장에도 났다. 원주의 시장들은 원주의 역사이고 문화이다. 시장 하나 하나가 지역의 역사 보따리고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원주의 소중한 문화 상품이다. 화재 피해자들이 속히 재기할 수 있도록 대책이 마련되길 바란다. 그래서 다시 활기차게 생업이 이어지고 역사와 문화의 보물 창고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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