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원주이야기] 부론 노림의숙은 원주3·1운동의 성지
[김대중의 원주이야기] 부론 노림의숙은 원주3·1운동의 성지
  • 김대중
  • 승인 2019.02.25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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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언론인
△김대중[언론인]

올해는 3·1운동이 백년을 맞는 해이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도 백년이다. 백세 시대라 하지만 강산이 열 번을 변하는 세월이다. 긴 시간이다. 내년이면 경술국치 백 십년이 된다. 나라가 망해서 일본에 식민지가 된지는 백년 하고도 9년이나 지났다. 191931일 서울서 발발한 독립만세운동은 대한민국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갔다. 원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주의 3·1운동 불길은 부론에서 가장 먼저 타올랐다. 부론은 어떤 땅인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정보와 지식이 제일 빠르게 도달하는 곳이다. 배운 사람들도 많았다. 그 핵심에 1915년 노림리에 설립된 사립교육 기관 노림의숙(魯林義塾)이 있다. 민족의식 교육이 일찍부터 이뤄졌다. 당시 노림의숙에는 나중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어수갑, 홍남표선생 같은 인물들이 교사로 활동했으니 어떤 학교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수갑, 홍남표 선생은 3·1운동이 나자 서울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1919322일 제1회 졸업식때 40명의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교육했다. 5일후인 327일 원주군수 오유영(吳惟泳)이 민심 수습을 위해 부론면사무소가 있는 흥호리(당시엔 홍호리가 면소재지) 마을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이때 군수에게 항거하려다 제지당하자 노림리로 돌아온 졸업생 7명은 한범우(韓範遇)의 주도로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들고 군수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다. 마침 군수가 노림리 마을을 지나려고 하자 길을 막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특히 졸업생들은 군수에게도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원주 최초이며 이후 원주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노림의숙 졸업생들의 만세운동후 원주는 면지역을 중심으로 마을마다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노림의숙은 그래서 원주역사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교육기관이다. 그후 노림의숙은 1938년 부론공립심상학교 부설 노림간이학교로 인가받았고 1945년 노림초교가 됐다. 원주 최초로 민간인들이 의연금으로 세운 사립 교육기관은 원주지역사회에 그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립학교에서는 칼을 차고 제복을 입은 일본인들이 식민교육을 했지만 조선 민중의 민족자본으로 세운 사립 학교 노림의숙에선 민족의식 교육을 했다. 노림의숙은 사라진지 오래됐지만 그 정신은 지역의 역사와 주민들의 삶속에 내려오고 있다.

일제 식민지 강점기는 세계 식민지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영토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영혼까지 지배하려 했다. 영혼까지 지배해야 영원히 한반도를 가질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망가지도록 통치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비하했고 폄훼했다. 식민교육과 총칼로 끊임없이 그렇게 했다. 한국인 스스로를 열등하게 생각하고 무능하다고 느끼도록 했다. 그 잔재는 아직도 우리의 어딘가에 남아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조선놈은 패야 된다는 식의 말들이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온다. 모두 일제의 식민교육의 잔재다. 철저하게 이뤄진 교육의 영향이다. 그 잔재가 그 시대 사람을 넘어 현 세대들에게도 대물림 된 것이다. 소름이 돋는다. 교육은 그래서 중요하고 무섭다. 백년전 노림의숙의 정신과 역사를 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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