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아쉬운 이별
[살며 사랑하며]아쉬운 이별
  • 임길자
  • 승인 2020.08.1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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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월요일 아침 민들레(이○○)님 방에 들렸다. 민들레님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계셨다. 어딘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아서 눈높이를 같이 하고 바닥에 앉았다. 어머님은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내 손을 잡는다. “원장님을 기다렸는데 오셨네. 오늘은 출장이 없나보군요. 내가 요즘 들어 온 몸이 부쩍 아픕니다.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고, 입에 들어오는 음식은 모래알 같고, 아이구 이젠 죽을 날이 가까운 것 같아. 하긴 뭐 오래도 살았지, 아흔여덟 해를 살았으니…”

민들레님은 어르신들 사이에선 큰언니로, 우리들에겐 큰어머니로 98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기억력이 탁월하셨다. 듣기와 걷기가 좀 불편한 것 말고는 늘 밝고 이성적이었다. 최근 들어 보청기 사용이 어려워지면서 일방적인 말하기로 의사소통을 이어가셨다.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으니 그 사람의 표정으로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는다. 입맛이 없어서 밥을 못 드시겠다고 하시면 막걸리를 한 잔씩 드렸다. 혼자 지내신 오랜 기간 민들레님에게 막걸리는 좋은 음식이었다. 사실 시설에서는 술 반입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장의 판단은 민들레님의 정서적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별도의 냉장고에 비상식량처럼 챙겨두고 어르신이 찾으면 한 잔씩 드렸었다.

“내가 추석 때까지 살려나 모르겠어. 하하하. 그때까지 살면 집에 갔다 오는 길에 막걸리를 좀 사오려고… 그동안 원장님한테 많이 얻어먹어서 내도 한번은 사야할 것 같은데… 하하하. 근데 내가 추석 때까지 살 수 있을까? 집도 좀 둘러보고 싶고, 증손자들도 얼마 컸나 보고 싶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온 몸이 아파죽겠다 하시면서도 웃으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을 가 딸 여섯 명을 낳고 일곱 번째로 아들 한 명을 출산했다. 민들레님에게 그 아들은 모든 일상의 시작이고 끝이었다. 그 아들이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애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들레님에게 그 아들은 그냥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의 것이었다.

10년을 같은 집에서 지내온 직원들 모두에게 민들레님은 큰어머니이고 큰할머니였다. 궂으면 궂은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이라는 관계망에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의 터도 있고, 말로는 다 설명되어지지 않는 원망과 서운함이 두루 얽히고설킨 채 웃음과 눈물과 한숨이 채워져 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들치고 살피다보면 어느 가정이나 몸 어딘가 부스럼 하나쯤은 다 안고 산다. 민들레님의 소망은 집에 자주 가는 것이었다. 집에서 당신을 보살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설에서 생활하는 부분에 대해 자식을 이해함은 물론 세상의 흐름을 인정하시는 듯 특별한 불평이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집을 그리워하셨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가족들 중 누가 생일이거나, 명절이 되면 당신이 집안의 어른이기에 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손자들 생일까지 모두 기억하고 계셨으니… 그렇지만 가족들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일에 10년쯤 집중하다 보니 가끔은 촉이 발동한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상상이지만 나의 예측이 적당히 맞아 떨어질 때가 있다. ‘이쯤에선 병원으로 모셔야겠다’는 판단이 서고, ‘오늘쯤은 보호자들이 곁을 지켰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몇몇 어르신은 혼자 떠나셨다. 민들레님은 추석 55일을 남겨두고 그렇게 가족들과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세상의 많은 변화는 임종을 지키는 환경도 달라지게 한 것 같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의 평균수명이 현재 82.7세로 나타났다. 또 2020년 6월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51,839,408명 중 생산가능인구가 28,244,000명이라고 한다. 2030년 쯤 되면 전체인구의 25.3%가 65세 이상 노인으로‘ 초고령 사회’ 한복판에 머물게 된다.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명은 존엄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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