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에서] 저승꽃이 필 무렵...우리는
[비로봉에서] 저승꽃이 필 무렵...우리는
  • 심규정
  • 승인 2020.10.18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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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정 [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심규정 [원주신문 발행인·편집인]

최근 지인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 당시 생생한 목격담이 아직도 기억의 수장고에 짙은 잔상으로 남아있다. 6인실인데 할아버지 환자가 5명이나 됐다. 필자에게 묵직하게 다가온 것은 3가지. 하나는 약간의 치매기가 있는 93세 할아버지, 또 하나는 말이 어눌한 70대 후반의 할아버지, 마지막은 한 끼 식사를 거뜬히 해치우고 다소 정정해 보이는 80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모두 ‘침묵의 살인자’인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들 환자들을 누가 돌보는지 눈여겨 봤다. 간병인을 두거나,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동생·여동생으로부터 노노케어를 받고 있거나, 직장에 다니는 두 아들이 번갈아 가며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에서 노화의 악령이 서서히 잠식하고 있음을 느꼈다.

건강수명이 늘어나면서 평균수명이 세 자리 숫자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현실화하는 느낌이다. 이른바 ‘실버 쓰나미’는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안기게 될 것이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올해 도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전체인구의 20.0%인 30만 2,000명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수치는 갈수록 수직상승할 것으로 예측됐다. 2030년 30.9%(47만 명), 2040년 40.5%(61만 4,000명), 2047년 45.0%(66만 3,000명)로 치솟을 전망이다. 필자가 생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쯤 인구의 절반 가까이 고령 인구가 된다는 계산이다.

고령 인구의 덩치가 비대해지는 것은 생명공학, 의술의 발전에 기인한다. 나이 들면서 으레 자연스러운 현상, 숙명적 올가미로 여겨졌던 노화는 언제부터인가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분위기다. 먼 훗날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노화 시계를 늦추거나 정지시키는 연구가 결실을 보게 된다면 20, 30년 뒤에는 진일보한 생명공학의 도움으로 노화 예방 접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전망이 벌써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 같은 긍정적인 전망을 두고 혹자들은 “턱도 없다”라고 콧방귀를 뀔 수도 있을 것이다. 겹겹의 병환, 녹슬어 가는 뇌, 장기 손상 등 갖가지 노화의 징표들이 아주 천천히 우리를 좀먹고 있을 텐데 이를 지연시킨다는 것은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 법한 영화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NIA)창립자이자 국제장수센터(ILC) 초대 센터장을 지낸 노인의학 전문의 로버트 버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노년기가 끔찍한 것은 나이만 먹다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늙어 가는 과정이 쓸데없이, 그리고 때때로 잔인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우며 고독하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노인, 노화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 많이 뒤처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이미 1992년부터 노인의학과를 정식 진료과목으로 채택해 환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나라 전체가 빠르게 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작금의 추세에서, 그리고 소아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가 있는 상황에서, 노인의학과가 없다는 것은 연령차별, 노인차별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그래서 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영국은 한 발 더 나갔다. 2018년 노년층을 더 세심하게 살펴보자며 고독부까지 신설했다. 노화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과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씁쓸한 마음을 지을 수 없다.

얼마 전 집사람과 함께 걷기운동을 하다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뒤뚱뒤뚱 걷는 어르신을 보고 설핏 이런 생각이 스쳤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처럼 노년을 구질구질하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서 자문해 봤다. “그간 내 몸에 소홀함은 없었는지?”, “나의 외피(신체) 나이는? 나의 내피(장기) 나이는?” 훗날 나무의 나이테처럼 자글자글한 주름, 쭈글쭈글한 살갗, 아무튼 몸 여기저기 핀 저승꽃을 끼고 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곱게 늙고 싶다”라고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

건강할 때 내 몸을 닦고 조이는 게 건강수명을 늘리는 요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습관화된 삶의 태도에 따라 바람직한 노년의 모습이 좌우될 수 있다. 지금 단풍이 산 중턱까지 물들이기 시작했다. 조만간 온 산을 울긋불긋 아름답게 치장할 것이다. 만산홍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아기단풍 보다 장대한 늙은 단풍이다. 예로부터 노인을 빗대 ‘지혜의 샘’, ‘지식의 창고’라고 했다. 인생 3막 노년을, 작지만 의미 있게 설계해서 하나하나 실천해 나간다면 더욱 반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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