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가을에 띄우는 편지 - 행복
[살며 사랑하며]가을에 띄우는 편지 - 행복
  • 임길자
  • 승인 2020.10.26 0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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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이 계절이 선물한 멋진 하늘을 향해 큰 기지개를 켜며 아침을 연다. 날마다 만나지는 수많은 생명의 안부를 마음속으로 묻고 전하며 어제와 다름없는 일터에 몸을 담근다. 눈이 부시게 화려한 햇살 사이로 소나무(어르신이 자신을 소나무라 불러달라고 요청)님이 들어섰다.

스물두 살 동갑내기로 만난 노부부의 이야기를 옮긴다. 남편은 대한민국 국방을 책임지는 직업 군인이었고, 아내는 갓 발령받는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첫눈에 서로의 원함을 알아본 두 사람은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 보지 않고 결혼을 했다. 머지않아 두 사람 사이에선 2년 터울로 두 아들이 태어났고, 잦은 이동에 아내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전방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는 두 아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두 아들은 건강하게 성장했고, 국가기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세월은 흘러 남편은 군인에서 일반인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집에는 두 부부만 남겨졌다. 이제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만을 위해 살자는 약속을 할 무렵 아내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소나무님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아온 나에게 이게 무슨 시련이란 말인가!” 세상을 향한 원망과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소나무님은 그렇게 화를 내는 시간도 사치라는 생각을 하며 아내의 치료에 집중하였다.

온 마음으로 아내를 살폈으나 누워버린 아내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식이․배설․체위변경 모두를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점점 아기가 되어가는 아내를 살피며 땅에 뿌린 눈물이 얼마며, 답답함으로 몰아 쉰 숨소리의 깊이는 땅을 뚫었을 것이라 했다.

소나무님은 아기가 되어버린 아내를 향해 세 가지 약속을 했다. “하나는 내 아내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자. 두 번째는 내 아내가 비록 불편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이 슬프지 않게 하자. 세 번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자.” 소나무님은 자신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봐 집안 곳곳에 글로 써서 붙여 놓고 수시로 자기 진단을 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십 년 세월이 흘렀다.

2015년 햇살이 눈 부시던 그해 가을 아내는 서둘러 먼 길을 떠났다. 남편은 아내를 경기도 모 수목원에 모셔두고 매년 ‘가을에 띄우는 편지’를 들고 아내를 찾는다고 했다. 얼마 전 다섯 번째 편지를 들고 아내를 찾아가 읽어드린 다음 곁에 두고 왔다며 올 가을 중요한 일을 해결해 기쁘다고 했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눈이 빛났고, 시종일관 미소가 가득한 얼굴은 미소년을 연상케 했다.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말씀은 듣는 이의 가슴을 진지하게 했고, 노신사의 정갈한 자세에서 묻어나는 향취는 흔들리며 사는 우리들에게 온기가 되었다.

올 가을이 작년의 가을과 같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하루하루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오늘은 어제의 이음이지만 내일은 오늘과 다르다는 것을 지나 보면 알게 된다. 주어진 매일의 일상에 스스로를 묶어 놓고 달라지는 자신의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면 내일은 선물일 수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된 내일이지만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의 무게와 온도는 달라진다. 그렇다고 내일을 욕심낼 필요는 없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언제나 빗나갈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금 이 순간에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지금 이 순간에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고, 그게 인생일 것이다. 드높은 하늘과 들판에 코스모스는 이 계절이 준 선물이니 잠시 마음을 펼치며 그 누군가에게 가을에 띄우는 편지 ‘행복’을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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