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자막들]책 냄새
[세상의 자막들]책 냄새
  • 임영석
  • 승인 2020.12.20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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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석 [시인]
△임영석 [시인]

내가 처음 책을 만들어 본 것은 1984년 고향 금산에서 시림문학회 회장을 맡아 동인지를 편집하고 시골 인쇄소에서 핀셋으로 틀린 활자를 뽑아내고 바꾸며 만든 ‘원시림’이란 동인지다. 나는 그때 인쇄소에서 제본하지 않은 인쇄용지를 보며 휘발성 냄새로 풍겨져 오는 책 냄새가 참 좋았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도 책 냄새를 맡으면 다른 어느 꽃향기보다도 더 아름답게 책에서 나오는 책 냄새를 맡으며 즐긴다.

올해도 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책으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흙에서 막 싹을 틔우는 풀잎 같은 것이고, 얼었던 물이 녹으면서 뱉어내는 물소리 같은 글들이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에서 맴도는 미소 같은 글들을 읽고 싶다. 때문에 그런 글들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확인하고 배우기 위해 나는 매일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는다.

그러나 모든 책이 다 향기로운 것은 아니다. 책에도 품격이 있어 오랜 시간 글을 다듬어 온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책의 냄새가 향기롭지 않다. 향기로운 글은 오래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책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가 짙고 곱다. 그게 글을 읽는 책의 맛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 네 보담도 내 보담도 /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시 ‘울음이 타는 강’ 전문

참, 아름답고 한국적 서정성이 깊은 시다. 이 한 편의 시속에 숨어 있는 세상을 읽어보면 친구의 첫사랑 이야기는 산등성이에 어둠처럼 짙어져 가고,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바라보는 그 황홀함, 강물에 젖어 있는 노을빛이 그만 첫사랑 끝에 새로 생긴 울음이라는 것이다. 그 노을빛이 바다에 이르러 더 붉은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그림으로 치자면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에 버금가는 그런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책에서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삶의 여백들이 무궁한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가난한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정치인이나 사업가가 그려내지 못하는 세상의 꿈을 영원히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을 통해 아름 따라 가시는 길에 꽃을 즈려밟고 가라고 말했고, 천상병은 이 세상 소풍 왔다 가는 마음이라고 말하며 살았다. 어디 그뿐인가. 김수영은 아무리 커다란 고통이 있어도 풀잎을 통해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했다. 나는 하늘의 어둠을 보고 “어둠도 하늘에서는 꽃피우는 나무다”라는 싯구를 받아 섰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새로운 책들이다. 글씨로 쓰인 책만 책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삶의 걸음을 옮기면 훌륭한 소설이 되고, 수필이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속의 의욕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뜨겁게 불태워 내는가에 달려 있다. 열매 하나를 맺기까지 과일나무는 하루 이틀에 열매를 맺는 게 아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고 키우며 좋은 열매가 맺도록 끝없이 노력해 주어야 수확의 기쁨을 맛본다. 내게 책 냄새는 바로 그 결실의 맛을 즐기는 행복을 안겨준다.

2021년은 누구나 새로운 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늘을 높이 나는 새가 세상을 더 많이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2021년에는 모든 이가 자신의 삶에 책 냄새보다 더 아름답고 향긋한 삶의 냄새를 짙게 풍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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