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자막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세상의 자막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임영석
  • 승인 2021.02.21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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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재야(在野)의 등불,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다
△임영석 [시인]
△임영석 [시인]

민족문학연구회 단톡방이 2월 15일 아침 7시 30분부터 백기완 선생의 타계 소식으로 들끓었다. 각 연구회 의장들께서 백기완 선생의 명복을 비는 마음이 수시로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2월 7일에 국회에서 단식 투쟁 중인 송경동 시인이 실신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사진과 함께 올라와 걱정을 했는데, 투병 중인 백기완 선생께서 세상을 타계했다는 소식이 또 전해진 것이다.

나는 백기완 선생과 가까운 인연은 갖고 있지 않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연단의 연사로 와 계신 선생의 모습을 청중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연설을 듣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2009년쯤 원주에서 선생의 강연이 있다고 하여 참석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저서에 싸인을 받으며 얼굴을 마주한 것이 전부다.

백기완 선생은 이 땅 민중의 모든 집회 때마다 애국가처럼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대변인 윤상원 씨와 들불 야학을 하다 숨진 박기순 씨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소설가 황석영 씨가 백기완 선생의 옥중지 ‘묏비나리’를 바탕으로 작사했고 당시 전남대생 김종률 씨가 곡을 써 부르기 시작해 1980년 이후 민중의 가슴에 애국가처럼 식전 행사에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원작 황석영 작사 김종률 작곡 「임을 위한 행진곡」 전문-

백기완 선생은 나에게 바다 같은 마음을 갖게 한 시인이었고, 사상가였고, 위대한 실천가로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다. 세상은 산 같은 사람만 남는다. 그러나 그 산을 푸르게 만드는 것은 빗방울 같은 무수한 사람들의 뜻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빗방울은 높은 산처럼 영원히 남아 있지 않지만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몸을 움직여 바다를 이루는 것이다. 그 바다가 없다면 이 세상의 큰 산은 그 의미가 없다. 백기완 선생의 목소리가 산의 메아리였다면 그 시대를 함께 산 수많은 사람들은 빗방울처럼 그 메아리를 듣고 살며 바다라는 곳으로 흘러들었다. 나도 그 빗방울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문단이나, 재야나, 큰 어르신들이 하나 둘 이 세상을 떠나시고 아니 계시다. 죽어서도 사는 법이 있다고 말한 백기완 선생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무엇이 죽어 사는지 몸으로 말한 사람이 백기완 선생이시다. 서슬 퍼런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민주주의를 부르짖었고, 이 땅 노동인권을 부르짖었고, 빈민의 하찮은 삶도 어느 꽃보다 아름답다고 부르짖었다. 이 부르짖음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며 외치는 표현의 자유, 행동의 자유, 주거의 자유를 누리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이 땅 수많은 사람이 권력과 명예만 탐내며 부와 명예를 챙길 때, 진정 죽어 사는 방법을 알려주신 분이다. 돈과 권력에 길들여 사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외치지 못한다. 자유를 외치지 못한다. 서민과 노동자, 농민, 가난한 사람을 위해 행동할 수 없다는 백기완 선생의 눈빛은 영원히 내 가슴에 꺼지지 않는 촛불이다. 왜, 백기완 선생님 저승 가시는 길 촛불 하나 켜 들고 그 발자국 소리 듣는데, 이 세상이 어둡고 캄캄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총칼도 없고, 분단도 없고, 억압도 없고, 고문도 없고, 노동자, 서민, 빈민도 없는 곳에 가셔서 하늘과 땅, 이 우주의 섭리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가시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백기완 선생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이제는 다 내려놓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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