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노나메기 세상을 설계하다
[살며 사랑하며]노나메기 세상을 설계하다
  • 임길자
  • 승인 2021.03.07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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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임길자 [문막노인복지시설 정토마을 원장]

지난 2월 15일, 한 노신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 노신사는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시민사회운동가이면서 통일운동가이며 정치인이자 작가이기도 했다. 88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3년 전 심장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자주 왕래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죽음과 함께 민중을 향해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빛도 더불어 사그라졌다. 백발을 휘날리며 검은 두루마기 속 가슴팍에서 뜨겁게 터지는 그의 불호령을 우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외치고 또 외치고 또 외쳤던 그의 외침은 오래도록 우리들의 귓전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는 1932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고, 1967년에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 설립을 시도했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었다. 또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뒤 구속되었다. 이후 1986년에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에도 다시 대선에 출마했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부여하는 명예와 권력을 종착지로 삼고 거리에서 싸우진 않았다. 그는 투쟁하는 민중의 곁에, 그 민중이 어떠한 주제와 행색으로 앉아있든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그의 삶이었다.

12년이 넘는 옥살이하는 동안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투옥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인권적 고문에 시달리며 신체적, 정신적 피해와 장애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망가트린 그의 몸뚱이가 투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서진 몸뚱이를 이끌고 다시 거리의 민중에게로 나갔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그가 발걸음이 향한 곳은 언제나 그의 결연함을 기다리는 민중들 곁이었다. 연설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권력을 향해 돌진하던 그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그의 삶에 대해 평가는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민중과 함께한 그의 삶에 존경을 표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이제 역사 안에서 수많은 이들의 관점을 통해 평가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그를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또 그를 미워했던 사람조차도 불현듯 광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는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재는 억울함에 몸서리치던 이들 옆에서 함께 울고, 고통을 나누던 민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생각이 깊어진다. 

한때 개념 없는 긍정주의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며 이끌던 정치인들과 장단 맞추던 어리석은 민중들, 퍼주기라는 논리 하나로 참담하게 무너져 가던 남북관계, 그 모든 현실은 인간 백기완을 실패자로 말뚝 박는 듯했다. 그러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던 리영희 선생님 말씀처럼 그의 실패와 희생은 역사의 느린 걸음에 반드시 필요했던 하나의 축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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