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조정권 作 / 백지 3
[시가 있는 아침]조정권 作 / 백지 3
  • 임영석
  • 승인 2021.03.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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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紙3

-조정권 作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써,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절을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고통苦痛,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지상至上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가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축적蓄績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유정有情한 눈길을 주다 보면

백지白紙는 비어 있음으로써 충일充溢한 불을 켜고 있다.

 

趙鼎權 詩選 『얼음들의 거주지』, 《미래사》에서

백지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종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깨끗함을 상징한다. 깨끗하다는 것이 좋은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더럽게 변할 수 있다는 것, 무한정 바뀔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조정권 시인의 시 「白紙 3」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도 질문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그냥 지켜보는 것 하나로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준다는 의미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더 구겨지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리 맑은 물도 먼 장천長川을 흐르다 보면 더럽게 변하게 되어 있다. 사람의 삶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이도 공장에서 막 만들어진 종이는 백색의 분진이 마르지 않아 곱고 희다. 그러나 오랜 시간 볕을 보고 바람을 씌면 그 백색의 분진이 날아가 색이 바래진다. 세상의 삶이 그렇다. 그래서 더럽다 깨끗하다는 이분법으로는 세상을 구분 짓는다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라는 대목도 바로 살은 뼈를 감싼 허물에 지나지 않기에 뼈를 허물어 내야 그 사람의 삶이 무너진다는 뜻도 담겨 있다. "백지는 비어 있음으로써 충일한 불을 켜고 있다"라는 것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임영석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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