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자막들]책인심(冊人心)
[세상의 자막들]책인심(冊人心)
  • 임영석
  • 승인 2021.05.02 2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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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석 [시인]
△임영석 [시인]

무릎 공부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받은 책들은 수천 권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김환식 선생님, 조남익 시인님, 정완영 선생님 등을 만나 받았던 시집과 책들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평생 책을 손에 쥐고 그 글들을 깨우치게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김환식 시인의 『소복무』, 조남익 시인의 『한국대표시해설』, 정완영 시인의 『연과 바람』 같은 사인본은 내 서재에서 가장 많이 읽고 즐기고 보듬어 보는 책들이다.

물론 나도 시집과 시조집, 시론집을 내며 숱한 사람들에게 보낸 책들이 있다. 매년 그래서 소중한 시인들에게 받아보는 책들도 수백 권에 달한다. 책을 받으면 감사와 고맙다고 메일이나 문자로 꼭 인사를 드린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책인심이 옛날과는 다른 것 같다. 소중하게 펴낸 책이니 돈 주고 사보는 것이 예의이다. 그러나 책을 보내면 책으로 답하는 책인심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불문율 같은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의다.

내다 버릴 곳도 마땅찮아 책들 태워 구들 덥힌다 / 홑 창호를 뚫고 밤새도록 혹한 파고든 고향 집 / 책장이나 찢어 군불 지피려 /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 불길이 옮겨붙는지 활자의 파란 넋들이 / 일어났다 주저앉는다 스러지고 스러지는 / 저 아궁(我窮) 속의 어떤 학습은 / 캄캄한 미로를 헤맸으나 굴뚝 없는 구들이었으니  / 매운 연기로 가득 찼으리라 생각이 드는 오늘 아침 / 불길이 넘기는 영문 원서는 / 책보다 먼저 타오른 큰형님 유품이라서 / 곁불에 찌드는 도형은 육지의 항해술로 파선한 / 작은형의 좌표고 크레파스 그림일기는 / 부도를 내고 피신한 아우네 조카들 일과겠지만 / 여기 어느 책갈피도 들춘 적이 없어 나는 / 실패한 형제들의 교과서를 찢어 불길 속에 던져 넣는다 / 책을 태워 온기를 얻으려니 평생 / 문자에 기대 여기까지 온 나의 분서갱유가 / 우스꽝스럽다 반면(反面) 핥는 불꽃이 / 비꼬는 혀들 같다 노모의 성경책까지 함께 사르니 / 교과서 구할 길 없어 친구의 책 훔쳤던 / 중학교 1학년짜리 오래된 아픔까지 겹쳐 너울거린다 / 저 잿더미 속으로 스러지는 활자 / 누구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하리라 / 학습이란 태워 올리는 불길일까, 타고 남은 잿더미일까?

▲김명인 시 「책을 태우다」 전문

책이란 마음을 담아 놓은 그릇이다. 그러니 내 마음을 보고 그릇된 것, 잘못된 것을 보아 달라는 마음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 마음을 담은 그릇이 어디가 모난지, 어디가 흉한지를 보고 지적을 해 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더 빛나고 아름다운 마음을 담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가까이 있는 주변의 시인들에게 책을 잊지 않고 보낸다. 그러나 요즘은 답이 없는 시인들에게는 점차 책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물론 살다 보면 바쁘고 한두 권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책에 일일이 답할 여유가 없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산의 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을 보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빼놓지 않고 보고 느끼고 다듬는 마음이 없이는 숲을 가꿀 수가 없다. 그러니 좋은 숲을 가꾸는 시인이나 소설가는 책인사를 빠짐없이 해 온다. 내가 15년간 한결추천시메일을 지속하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좋은 글을 읽어보라는 책인사 덕분이다. 일면식도 없지만, 35년 넘도록 나는 소중한 시인들의 책인사를 받으며 살았다.

김명인 시인의 시 「책을 태우다」를 읽어보면 “학습이란 태워 올리는 불길일까, 타고 남은 잿더미일까?” 묻고 있다. 마음은 태워도 태워도 재가 남지 않는다. 꽃향기야 벌과 나비를 불러 열매를 맺게 하지만, 책은 마음의 씨를 남기는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부른다. 어디를 가나 세상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로 넘쳐난다. 모두 이 세상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글들이고 책들이다. “국화꽃 한 송이 피우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서정주 시인은 노래했다. 자연이라는 책을 읽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자연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자연은 무궁하게 자신들이 쓰고 가꾼 글들을 보여준다. 자연의 아름다운 책인심에 감사하는 마음은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일 것이다.

오월, 계절의 여왕답게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수십 년 동안 나에게 책을 보내주고 마음을 보내준 사람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오늘이라는 책을 또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약속된 내일이라는 시간의 책을 어떻게 읽고 살아갈 것인가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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