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살구와 사람 사이
[안부를 묻다] 살구와 사람 사이
  • 임이송
  • 승인 2022.08.14 15: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지금은 과일이 익기 좋은 계절이다. 우리는 살구다. 잘 익은 노란 살구. 우리는 나무에 달려 있기도 땅에 떨어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마대자루 담겨 진물을 흘리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101호 앞에 있는 살구나무에 매년 달린다. 엄밀히 말하면 같은 살구는 아니다. 그렇지만 일일이 이름을 붙일 수 없어 같은 살구인 양 말한다. 우리가 겨울을 지나 꽃을 피우면 아파트 주민들은 너나없이 우리를 보며 환호한다. 겨울을 잘 이겨내고 예쁜 꽃을 피워낸 것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꽃을 떨군 우리는 볕을 더 받으려 애쓰고 비가 오면 수분도 더 많이 빨아들이려 뿌리를 깊이 뻗는다. 꽃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힐 때만 해도 사람들은 우리를 기특해 한다. 풋살구인 우리가 봄볕에 하루가 다르게 알이 굵어가는 것도 탐스러워 한다. 노랗게 익기 시작할 땐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 안엔 달고 신 침이 고인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는 보람차다.

비극은 우리가 다 익었을 때 시작된다. 아무도 우리를 따먹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견디다 못한 우리는 땅으로 떨어진다. 나무 밑이 노래지면 경비아저씨는 빗자루로 우리를 쓸어 모은다. 흙투성이가 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놀란다. 어떤 친구는 짓물렀고 어떤 친구는 빗자루에 쓸리어 상처가 나 있다. 여러 무더기가 쌓이면 아저씨는 마대자루 우리를 쓸어 담는다. 날씨가 더워 며칠 만에 우리는 서로의 살과 살에 부딪혀 자루 안에서 진물을 흘리게 된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온전한 모양으로 떨어져 있는 우리를 주워 요리조리 들여다보곤 고개를 갸웃한다. 잠시 후 우리를 흙바닥에 내던져버린다. 화단에 떨어지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길에 떨어지면 사람들의 발에 밟혀 뭉개지고 만다.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모두 나무에서 떨어지면 경비아저씨는 작년처럼 나무 밑에 구덩이를 판다. 그러고는 짓물러진 우리들을 구덩이 안으로 쏟아 부어버린다. 아무도 우리의 비명에 발걸음을 멈추는 이가 없다. 우리는 평평하게 흙으로 덮여진다. 올해도 그렇게 세상에서 또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내년에 달릴 살구들의 거름이 되기 위해.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공해 때문이다. 도시의 열매, 특히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과실을 도시 사람들은 먹지 않는다. 자신들이 주차한 근처에 있는 과실은 더욱 먹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런 신세가 된 건 아니었다. 아파트에 자동차가 적었을 때는 우리를 서로 따 먹으려 했다. 채 익지도 않은 걸 따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도시의 가로수인 은행을 더 이상 먹지 않으면서 우리의 처지도 서글퍼졌다.

그런데 불행 중 반가운 일이 생겼다. 옆 동 살구나무의 살구가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 할머니가 잘 익은 살구를 따거나 떨어진 것들 중 흠집이 작은 것을 주워, 아파트 입구 좌판에서 팔고 있다.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파트 주민들이 산다.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남기며.

언젠가 들은 이야기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사실 나는 아파트 마당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매연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게다가 도로와도 멀어 그리 오염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알이 굵고 노랗게 익을수록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길에서 같은 아파트의 것을 파는 할머니의 살구는 의심 없이 사먹으면서도.

살구인 우리와 사람 사이엔 결국 무덤만 남았다. 우리는 내년엔 또 다른 살구로 달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꽃으로만 세상에 나가고 싶다. 그 꽃도 벌이 점점 찾아오지 않아 슬픈 일이지만.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들에게 달고 신, 맛있는 먹거리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들이 죽어서만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줄 안다. 우리가 묻힌 곳에 사람들의 마음과 맛과 기쁨이 같이 묻힌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 무덤에 언젠가 자신들의 소중한 또 다른 것들이 묻힐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