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강릉으로 간 김금원
[문화칼럼] 강릉으로 간 김금원
  • 전영철
  • 승인 2022.09.25 2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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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철 [상지대학교 교양학부 교수]<br>
△전영철 [상지대 FIND칼리지학부 교수]

추석이 지나고 바로 일주일 뒤의 주말, 전국 여기저기서 축제며 문화 관련 행사가 열렸다. 정선 아리랑, 경기 화성 전곡항과 제부도에서의 뱃놀이축제, 강릉과 동해안에서의 선교장 달빛 기행과 관동풍류 등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행사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강릉에서 열린 관동풍류×바다열차, 선교장 달빛방문이다. 관동풍류는 열네 살 소녀의 나이로 남장을 하고 부모의 허가를 득해 제천 의림지와 단양8경, 금강산, 관동8경을 유람하고 나서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기행서를 남긴 김금원을 따라가는 여행이었다.

코레일과 문화재청, 한국문화재재단이 문화재방문 캠페인의 일환으로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하루 두 번씩 한 행사였다. 낭만을 싣고 달리는 바다열차를 타고 김금원을 재현하는 배우의 해설을 따라 정동진역, 묵호역, 삼척역까지 가서 죽서루에서 당시의 김금원이 읊었던 시를 들으며 관동풍류를 즐긴 것이다. 밤에는 선교장 달빛 기행에 합류하여 그때 당시 소녀의 꿈과 풍류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선교장 달빛 기행 프로그램은 그동안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서울 창덕궁의 달빛기행을 강릉 경포대 주변 선교장에서 펼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원주에 살았던 김금원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바느질이나 살림보다 글을 가르쳤다는 부모 아래 성장하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15세의 나이가 되면 비녀를 꽂고 성인이 되어야 했던 당시의 여성이었다.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야만국이 아닌 문명국에 태어난 것은 다행이나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과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지 못하고 한미한 집안에 태어난 것은 불행이라고 했다. 또한 평소 어질고 지혜로운 성품과 사물을 통찰하는 눈과 귀를 물려 받았으니 다만 산수를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보고 듣는 것을 넓히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김금원은 그러기에 성인이 되기 전에 절실한 심정으로 부모를 졸라 제천과 단양, 금강산, 관동팔경을 구경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소녀는 제천 의림지로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심정으로 여행에 대한 설렘을 묘사한다.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을 나와 끝없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좋은 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은 채 천리를 달리는 기분이로다.” 얼마나 감개무량 했을까? 금강산에 다다라서는 “눈 쌓인 언덕 같고, 불상 같고, 칼 든 군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같고, 연꽃과도 같고, 파초 잎과도 같다. 추켜올린 것도 있고 내려뜨린 것도 있고 더러는 가로 갔고 더러는 세로 섰으며 일어서 있는 것도 쭈그리고 있는 것도 있다.”라고 열네 살 소녀의 글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묘사로 명문을 남겼다.

여행의 말미에 동해안을 유람하면서 동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시 한수를 읊는다. “百川東匯盡(백천동회진) 모든 물이 동쪽으로 흘러드니 / 深廣渺無窮(심광묘무궁) 깊고 넓어 아득하게 끝이 없네. / 方知天地大(방지천지대) 이제야 알았네 하늘과 땅이 아무리 커도 / 容得一胸中(용득일흉중) 내 한 품에 다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김금원은 현대사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 가지의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안고 있으나 동시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과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원주의 인물이다. 진취적인 기상이 부족한 청소년, 남녀 간의 젠더 갈등, 당장 눈앞에 있어도 가지 못하는 금강산과 남북 문화교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통일부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국관광공사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김금원의 여행길을 토대로 막힌 남북 문화교류나 청소년의 교육적 활용, 청소년 교류가 필요했음을 제안하였으나 함흥차사였다.

문화재방문 캠페인의 일환이지만 김금원이라는 인물의 시각을 공유하면서 우리의 산하와 문화재를 유람하는 행사를 선교장과 관동8경을 중심으로 펼쳤다는데 대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더불어 감사함을 느꼈다. 원주에서도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도시의 특성을 살려 다양한 문화재 활용사업이나 원주문화재야행 같은 행사를 훌륭하게 펼치고 있다. 이제 한 단계 진화하여 한발 더 깊숙히 들어가 당시 그곳에 살았던 원주사람들의 서사에 다가갔으면 좋겠다. 그를 통해 시대와 장소의 경계를 뛰어넘어 문화다양성의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소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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