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나는 만만한 사람이 좋다
[안부를 묻다] 나는 만만한 사람이 좋다
  • 임이송
  • 승인 2022.10.09 2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나는 누군가에게 만만한 사람일 수도 깐깐한 사람일 수도 있다. 주변 평을 들어보면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우리 아이들에겐. 딸아이에겐 나는 두 모습이 공존하는 것 같다. 딸이 나를 만만해 하면서도 조심스러워 하는 구석이 있는 걸 보면. 나 또한 뭐든 딸과 이야기하지만, 아이가 예민하거나 힘들거나 바쁠 때는 행동을 삼가는 편이다.

남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고 공감하는 편이라 나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나를 만만하게 여기진 않는다. 그 이유는 타인에게 열려 있는 만큼 내게 깐깐한 구석이 있어서일 것이다.

막막하거나 자존심이 상한 일이 생겼을 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친구들에게 막상 치부를 보이자니 자못 꺼려질 때가 있다. 그때 앞뒤 재지 않고 전화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친정엄마다. 엄마가 이해심이 깊거나 내 마음에 공감해 주거나 그 일을 해결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평소처럼 전화하여 몇 마디만 나누어도 마음이 다소 진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 같으면서도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문제해결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게 최고의 사람이 될 것이다.

사위가 결혼 전에는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더니 결혼 후엔 장모님이라 불렀다. 나는 계속 어머니로 불리고 싶어, 딸아이가 혼자 집에 왔을 때 언뜻 내 뜻을 비쳤다. 그런데 여전히 장모님이라 부르기에 사위 나름 호칭을 그렇게 정리했나 싶어, 그냥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위가 나에게 어머니와 장모님 중 어떤 호칭이 더 좋으냐며 물었다. 나는 단번에 어머니라고 했다. 사위는 그 자리에서 어머니로 불러 주었고 장인어른도 아버님으로 바꾸어 불렀다.

만만한 사람의 사전적 의미는 ‘대하거나 다루기 쉬울 만큼 호락호락하다’와 ‘무르고 보드랍다’다. 그 뜻을 깊숙이 들여다보노라면 복병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대하기 쉽고 호락호락하게 느껴지다 보면 자칫 함부로 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처와 관계의 틀어짐은, 함부로 대하는 데서 나오는 말과 행동과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만하다고 무시해선 안 된다.

달리 표현하면, 내가 장모님으로 불리어지고 싶지 않은 이유는 호칭이 주는 무게감과 정서적 거리감 때문이다. 나는 사위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른다. 사부인도 며느리인 내 딸의 이름을 부른다. 사위가 장모님이라 부르는 순간, 나는 이서방이라 불러야만 할 것 같다. 나는 사위와 만만한 사이가 되고 싶은데.

남편은 내 전화번호를 내 이름으로 저장해 놓았다. 별것 아니지만, 나는 그것이 좋다. 이름이 주는 것만큼 정답고 살가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호칭 또한 마찬가지다. 언니라고 부르는 것과 언니야로 부르는 것만 봐도 정겨움의 차이는 다르다. 언니가 없는 나로서는 친구가 자기 언니에게 언니야로 부르는 걸 보면, 세상을 하나 더 가진 사람처럼 부럽다.

만만하다의 한자어 뜻 중 하나는 ‘넘칠 만큼 넉넉하다’다. 순 우리말의 의미에서 부족했던 부문을 채우기에 적격이다. 호락호락하지만, 넉넉한 사람. 누가 그런 사람을 함부로 대하겠는가. 큰 품을 가진 사람을 만만해하면서도 존경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고 그런 사람을 가진 이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체력과 정신적인 면에서 유약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완벽을 추구하려는 성향을 지녀 매사가 힘에 부친다. 그래서 곁에서 오래 함께 할 사람들은 좀 만만했으면 좋겠다. 허허실실 하지만, 알맹이가 있는 그런 사람들로.

사위에게도 어머니라는 호칭에 걸맞으려면 나 또한 대하기 쉬우면서 보드랍고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꾸만 굳어가는 나이라 보통의 노력으론 어렵겠지만, 애써 볼 생각이다. 내가 지금 이만큼 사는 것도 세상 만만한 남편이 곁에 있어서다. 그 덕분에 사는 것이 징검다리 건너듯 가끔은 만만했다. 누군가도 사는 것이, 나로 인해 더러 만만했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