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사지 지광국사현모탑의 부활을...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모탑의 부활을...
  • 김대중
  • 승인 2016.03.2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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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언론인>

원주에 한반도를 대표했던 절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절이 법천사와 거돈사다. 그러나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있다. 고려때 화엄종과 함께 불교의 양대산맥을 이룬 법상종을 대표한 사찰이 법천사이고 화엄종을 대표한 절이 거돈사다. 불교 국가 였던 고려시대를 대표한 사찰이었다는 사실만해도 대단하다.

그런데 더 대단한 일들이 넘친다. 바로 그 법천사에 있던 사람들이다. 시대를 대표하고 불교계와 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법천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두명 있다.

첫째가 고려 최고의 승려로 꼽히는 지광국사 해린이고 두번째가 조선초 최고의 재야 학자 태재 유방선이다. 원주에서 태어난  해린은 유학(儒學)에 뛰어났으며 문장에도 출중했다. 고려를 대표하는 법상종은 물론 당시 불교계를 상징했다. 법천사에서 입적한후 문종이 그를 기리는 묘탑과 묘비를 세웠다.

국보 101호 지광국사현묘탑과 국보 59호인 지광국사현묘탑비다.  왕사와 국사를 지낸 고려 최고의 고승에 대한 문종의 예우에 맞는 걸작중 걸작이다.

우리나라 현존 부도중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다는 돌탑이다. 또 하나는 부처의 진신사리도 아닌 법력 높은 고승의 사리이면서 탑에 모셔졌다. 부도이면서 탑이라 불리는 부도는 지광국사외에는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이 지광국사현묘탑의 수난이 참 기가 막히다. 가히 대한민국의 수난사를 온몸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때 왜놈들이 법천사 절을 홀랑 태워 없애더니 400여년후인 1915년 일제 강점기에는 왜놈들이 그 탑을 아예 도둑질해 갔다. 그후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으나 원래 있던 원주 법천사터가 아니라 경복궁으로 가져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경복궁에 모셔진 것도 잠시 6.25한국전쟁때 박격포에 맞아 무려 1만2천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 조각들을 시멘트 등으로 땜질하듯 붙여 여태까지 왔다. 역사 문화에 대한 문외한도 그러지는 않을텐데 말이 안나온다.  

오는 22일부터 해체 복원에 들어간다. 18일엔 코미디같은 뉴스가 대한민국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수십년 동안 도난된 것으로 알려져있던 지광국사현묘탑 기단부에 있던 4개의 사자상이 수장고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두 번째 인물이 조선초 재야의 대학자 태재 유방선이다. 법천사 절집에 살면서 조선시대를 좌지우지하던 한명회 서거정 권람 이보흠 등을 길러냈으니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송도(개성)에서 고려말 1388년에 태어나 1443년 56세로 떠난 유방선은 목은 이색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특출한 자질의 신동이었다. 140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 나이 17세 였으니 그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입증됐다. 하지만 4년후 1405년 아버지의 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태종때 아버지가 원경왕후 동생 민무구의 옥사에 연류되면서 집안은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났고 태재의 삶은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서원(청주)으로 유배된후 1415년에 사면돼 원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모함을 받아 영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1427년에 사면된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서 살았다. 학문 정진과 후진 양성에만 혼신을 다했다.

세종은 높은 학식과 인품을 훌륭히 여겨 여러차례 집현전 학자들을 보내 스승 대우를 하면서 학문에 대해 의논했다.작은 벼슬까지 내렸지만 끝내 출사치 않았다.법천사는 그런 인물들을 유인했다. 법천사의 상징 지광국사현묘탑과 비의 부활을 기도한다. 귀향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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