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길의 도시’ 원주에서 원주를 묻다
[문화칼럼] ‘길의 도시’ 원주에서 원주를 묻다
  • 전영철
  • 승인 2023.05.21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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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가 문화도시가 되는 데에는
우리나라 문화계를 이끌어가는 분들의
원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
△ 전영철 [상지대 FIND칼리지학부 교수]
△ 전영철 [상지대 FIND칼리지학부 교수]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을 이어주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산적과 같은 도적떼의 잦은 출현과 이를 피하기 위해 물을 이용하였다. 당시 가장 넓고 깊은 물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 한강이었고, 그 한강은 마포에서 두물머리를 지나 한 축은 북한강으로 춘천으로 향하고, 한 축은 양평, 여주, 원주를 지나 충주로 이어지는 남한강이었다.

실제로 국도(國道)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으며 조선후기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지역사정에 따라 쌀, 면포, 동전 등을 납부했는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대부분 남해를 통해 서해로 이어지는 바다 길을 이용했다. 이때 발달했던 곳이 법성창, 공진창, 경창이었고 강원도 원주는 내륙수운으로 경창까지 운반했던 곳으로 창고역할을 했던 흥원창이 있었다.

한강은 고려와 조선시대 왕실의 사찰로서 기능했던 남한강변의 많은 사찰들을 전성기로 이끌었다. 여주의 신륵사, 고달사, 원주의 법천사, 거돈사, 흥법사 등의 사찰이 번성을 누렸다. 특히 원주는 강원감영이 위치한 행정의 중심지요, 남한강의 북원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철길이 항구도시까지 물자를 운반하는 일본의 수탈의 통로가 되었으며 산악으로 말미암아 가장 공사가 어려웠던 중앙선은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완공이 되기에 이른다. 이 중앙선은 미비하게나마 경부선의 제2축의 역할을 하였지만 그보다는 석탄과 시멘트 등 한국근대화의 과정에서 산업철도의 역할을 일정부분 담당했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렇게 한국 근대화의 100년이 지나가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원주는 한국전쟁 이후 지난 1953년 인제에 있던 1군사령부가 원주로 이전하면서 군사도시의 특성을 강하게 갖게 된다. 1군의 많은 지원부대와 미군 캠프 롱의 주둔 등으로 군사도시로서 소비도시의 성격을 가지며 2000년대 초반까지 군사도시, 물류교통도시, 교육도시, 소비도시로 발전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기능적인 도시의 특성인 의료기기도시, 휴양관광도시, 자동차부품생산도시, 대학도시 등의 성격이 첨가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5소경 중 북원경,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 주요 행정 도시로서 당연히 따라붙던 문화도시라는 수식어가 남성적인 군사도시로 변화한 역사는 반세기에 불과한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소설이 안 써졌을 때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원주통신(原州通信)’이라는 수필집을 내셨고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부지런함으로 원주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았다”라고 표현하였다.

원주는 치악산과 남한강, 섬강이 준 자연적인 환경 속에서 열린 생각으로 생명의 존엄함과 가치를 고민했다. 무위당 장일순, 김지하, 박경리 선생님의 노력 또한 있었다. 더불어 지학순 주교님을 비롯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원주는 민주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시민운동이 강한 도시라는 지점으로 발전하였다. 많은 도시들이 급속한 산업화의 흐름에 편리한 먹거리와 삶을 동경하던 시절에도 원주는 한살림과 같은 유기농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현대 한국사회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을 먼저 고민했던 도시였다.

이러한 과정의 설명을 통해 원주는 2019년 법정문화도시가 되었고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가입 승인되었다. 그런데 작년 겨울부터 여기저기서 지역문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원주시민의 바람대로 문화도시 브랜드 획득에 성공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정문화도시 원주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한지테마파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카데미 극장은 정말 주차장 20면으로 바뀌는 거예요?”, “원주다이내믹댄싱카니발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디 이뿐인가. “생명협동교육관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문화관련 중간지원조직은 제대로 운영될까요?”라고 원주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원주가 문화도시가 되는 데에는 우리나라 문화계를 이끌어가는 분들의 원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상당부분 역할을 했음을 이번 기회를 빌려 말씀드리고 싶다. 이러한 걱정에 원주는 성실한 태도로 응답할 의무가 나름 있다. 문화도시는 어떠한 브랜드나 사업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그곳에 현재 살고 있는 시민의 삶과 태도에서 외부로 보여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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