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해진을 기다리며
[안부를 묻다] 해진을 기다리며
  • 임이송
  • 승인 2023.07.16 2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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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땅에 핀 꽃 같다.
작은 아이 하나가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만드는 걸 보면.
세세연년 지상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었으면 좋겠다.
△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열흘 전에 조카가 딸을 얻었다. 조카는 여동생의 아들이다. 우리 집안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 건 20년 만이다. 아이의 출생으로 온 집안이 들썩거렸다. 손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입술을 오물거리는, 출생 직후의 동영상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두 달 전에 여동생은 나에게 자기 손주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아이 부모도 이름을 짓고 있지만, 나도 같이 지었으면 했다. 내가 조카 네댓 명의 이름을 지은 이력이 있어서이다. 사전을 펼쳐놓고 다섯 개의 이름을 지었다. 그 중에서 해진이라는 이름이 성과 어울리고 뜻도 좋았다.

결국엔 아기 엄마가 지은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였지만, 이름을 짓는 내내 나는 아기에게 좋은 기운과 사랑을 불어넣어주었다. 수없이 불릴 그 이름으로 건강하고 사랑받고 사랑을 베푸는 아이로 성장하길 바랐다.

출생의 기쁨을 느끼는 한편에선 슬며시 근심이 찾아들었다. 아이 엄마도 직장 여성이라 출산휴가가 끝나면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해야 한다. 이 문제는 그 가정만의 일이 아니기에 나에게도 걱정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열 달 동안 기다렸던 설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 안전하고 따뜻한 온도로 클 수 있을까. 엄마의 체온과 체취를 느낀 아기가 다른 이의 손에서도 잘 자랄 수 있을까. 작은 아이가 준 생각의 파장은 일파만파 커져갔다.

인상적인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방과 후에 초등학생들이 할머니 집 마당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할머니와 아이들은 친인척 관계가 아니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할머니 세 분이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그들의 동행은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해 먹이고 숙제를 시키고 마당에서 맘껏 뛰놀게 하였다. 부모들은 퇴근길에 들러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나는 동네사람들의 모습에서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모두의 얼굴이 환하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들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아이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고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의 얼굴에도 여유가 느껴졌다. 타인이 타인을 대가 없이 돌보는 데서 온,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할머니들끼리도 혈연관계나 지인 사이가 아니었다. 각 할머니들은 남편과 사별 후 우울증과 불면증과 외로움을 앓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서로 의지하며 노년을 보내러 모여 살게 되었고 한마음으로 동네아이들까지 돌보게 되었다. 그 덕분에 할머니들은 건강해졌고 아이들은 안전해졌고 부모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데 정도는 없다. 아이가 보호받고 지속적인 격려와 사랑 속에서 자라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나라와 커다란 꿈을 누가 양육하고 돌보든 키우고 자라게 하면 되는 것이다.

딸이 결혼하기 전엔 아이를 낳으면 봐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깨와 허리가 좋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하였고 나도 간절히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맡길 데가 마땅치 않으면 어쩌겠는가. 점점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는 그 부모의 자식을 넘어 한 집안과 동네와 나라의 자식이 돼버렸는데.

나는 또 다른 해진을 기다린다. 우리 집에서건 다른 어느 집에서건 많은 해진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올 설에만 해도 집안엔 세뱃돈 줄 아이가 없었다. 인구 피라미드는 이미 기형적인 형태를 보인 지 오래되었지만, 파멸로 가는 길은 막아야 한다. 우리들의 기꺼운 동행의 힘으로.

어떤 철학자는 빛은 하늘에 핀 꽃이라고 했다. 아이는 땅에 핀 꽃 같다. 작은 아이 하나가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만드는 걸 보면. 세세연년 지상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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