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모든 날이 오늘이다
[안부를 묻다] 모든 날이 오늘이다
  • 임이송
  • 승인 2023.08.20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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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즐기며 그리웠던 동네도 보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기 선물을 사러 나선 오늘은
갖은 봉변을 당했다.
그런 날도 오늘이고 이런 날도 오늘이다.
△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넉 달 전에 대학병원에서 택시를 탄 적이 있다. 그때 기사는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좋은 손님이 타면 신호에 한번도 걸리지 않고 터미널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별것 아닌 말에 검사로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는 내가 창문을 내리고 한 동네를 유심히 바라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가 어딘지 아느냐며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가 제일 좋은 동네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20여 분 거리를 신호에 걸리지 않고 터미널까지 갔다. 내가 그 도시에 20년간 살았을 때에도 연동구간을 신호에 걸리지 않고 다닌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는 기쁜 일로 다시 오라며, 정답고 극진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날 좋은 사람이 되었다.

오늘 집을 나설 때 가랑비가 왔다. 도서관에 들렸다가 아기 선물을 사고 장도 볼 생각이었다. 아파트를 막 벗어날 즈음 오른쪽 샌들의 앞코가 벌렁거렸다. 접착 부위가 떨어져 있었다. 근처 가게에서 고무줄을 얻어 고정하니 걷는 데엔 불편하지 않았다. 신발이 불안하여 도서관에는 가지 않고 곧장 백화점으로 갔다. 장을 볼 때 고무줄을 사서 한번 더 벌어진 곳을 고정시켰다.

선물을 사고 장을 봐서 나오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한 바람 때문에 비는 사선으로 달려들 듯 왔다. 선물은 부피가 커 대형 종이가방에 넣어놓은 상태였다. 며칠 먹을 찬거리도 사느라 짐이 많았다. 이미 내 어깨엔 집을 나설 때 메고 간 가방까지 있었다. 선물가방이 젖을까 최대한 품에 안았다.

집까지 걸어오려면 꽤 먼 거리였다. 택시를 타기에 애매하여 평소에 걸어 다니는 길이다. 백화점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너는데 고정해놓았던 신발의 발등이 통째로 쑥 빠져버렸다. 샌들은 발등과 발바닥이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왼쪽 신발만 신고 걸으니 몸이 자꾸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왼쪽 샌들마저도 벗어버렸다. 얼마쯤 걸었을까. 뾰족한 것에 발바닥이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억수같이 달려드는 비와 많은 짐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냥 절룩거리며 걸었다.

종이가방을 젖지 않게 하느라 다른 짐은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타일로 된 인도를 걸을 땐 발바닥이 덜 아팠지만 자전거 도로로 해놓은 곳은 재질이 까칠하여 아팠다. 길은 가도 가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았고 세차게 오는 비도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가 쌩하게 달려가는 차가 물 폭탄을 여러 번 안겼다. 옷은 이미 다 젖었다. 한 발 한 발 걷다 보니 저만치 우리 아파트가 보였다. 집 근처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비가 약해지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찔린 발바닥은 더욱 아파왔지만.

집에 들어서자마자 종이가방부터 확인했다. 온몸으로 사수했지만, 젖고 구겨지고 어떤 곳은 찢겨 있었다. 내일 아침에 가져가야 할 선물인데. 오른쪽 어깨에 멘 가방엔 물이 그득했다. 책과 오늘 마감인 원고가 들어 있었는데. 아픈 발바닥을 살펴보았다. 발바닥 여러 곳이 불긋불긋 성이 나 있어 찔린 곳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다. 창밖을 보니 햇살이 반짝였다. 나는 젖은 옷과 가방을 빨고 종이가방을 말렸다.

살아오면서 오늘 같은 날은 여러 번 있었다. 끝이 올 것 같지 않은,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던 날은 연동구간을 시원하게 내달렸고 여든이 다 되어간다는 기사님에게 귀한 대접까지 받았다. 봄비를 즐기며 그리웠던 동네도 보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기 선물을 사러 나선 오늘은 갖은 봉변을 당했다. 그런 날도 오늘이고 이런 날도 오늘이다. 내가 사는 모든 날이 오늘이다. 그날의 운명은 오롯이 자기 몫이지만, 그래도 세찬 비는 반드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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