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생의 질서
[안부를 묻다] 생의 질서
  • 임이송
  • 승인 2023.10.15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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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황에서도 꽃이 피어나고 아이들이 태어나듯,
나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하루라도 제대로 살 수 있다.
△임이송 [소설가]
△임이송 [소설가]

나는 가끔 파격을 원하고 일탈을 꿈꾼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내가 만들어놓은 질서 안에서 움직인다. 그래야 매사가 평안하고 순조롭기 때문이다. 하루도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인생 전체에도 나름의 규칙을 세워놓고 산다.

남편은 앞으로 4년만 더 일하고 그다음부턴 여행을 다니며 살자고 했다. 배우고 싶었던 것과 하고 싶었던 것들도 하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한 달 살기도 해보자고 했고. 우리는 다가올 노후를 그 기대감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도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가 되었기에, 우리만의 삶을 즐기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부모를 간병해야 할 일이 생기면서 남은 우리의 시간이 위험해졌다. 나 못지않게 남편 또한 그 상황이 힘들긴 마찬가진가 보았다. 평생 일만 해온 사람이라 일에서 놓여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노노老老케어를 해야 할 상황이다. 부모를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 라는 생각이 우리를 한없이 망연하게 했다.

우리의 대부분의 의무를 끝내고 맞을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을 부모들을 케어하는 데에 쓰고 나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우리가 만들어놓은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아득하다. 부모가 아프면 당연히 돌보아야 하지만, 우리가 덜 아프면서 보낼 마지막 시간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못해 서글프다.

각 나이를 살아오는 동안 어느 한 구간을 간절히 기대한 적은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집 장만하느라 앞만 보며 달려왔다. 주체적으로 자신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은 건 다가올 노년의 시간이 처음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생명이 있는 동안 우리가 가질 마지막 여유로움이고 희망이었다. 그런 시간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오래 사귄 연인과 이별하는 것처럼 아릿아릿하다.

그간 살아오면서 내가 세워놓은 질서가 깨진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생일날이 가장 슬픈 날이 되어버린 적도 있었고 딸의 돌잔치를 하지 못하기도 했고 어버이날에 뜻하지 않은 일로 종일 굶어야 한 적도 있었고 문집 한 권 분량의 글이 인쇄소에 넘어가기 직전에 모두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소소하고 또 크게 깨져버린 상황은 부지기수다.

양가 부모가 하루아침에 몸을 쓰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집안일을 하고 따뜻한 점심을 해먹고 도서관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돌아오는 길에 산책을 하고 장을 봐와서 저녁을 하고 책을 읽고 스트레칭을 하는, 그런 루틴이 요 며칠 깨졌다. 그 루틴이 만들어진 것도 겨우 일이 년밖에 안 되었는데. 앞으로도 이 모든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깨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못할지도 모른다. 노부모의 건강은 예측할 수 없기에.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도 꽃이 피어나고 아이들이 태어나듯, 나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하루라도 제대로 살 수 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나를 살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올 봄 날씨가 풀려 거실에 있던 화분을 테라스에 내어놓았더니 잎이 자꾸만 병들었다. 강한 햇빛 때문인 것 같아, 두어 달 전에 다시 거실에 들여놨다. 자세히 보니 잎이 떨어진 자리에 여린 속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 마음의 위치를 바꾸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거야.’ 그러고 나서야 의욕과 식욕이 생겼다. 나와 남편이 걱정되어 서울에서 아들이 내려왔다. 아들도 20년 후면 지금 우리 부부와 같은 상황에 처하겠지. 부모님들에겐 지금이 당신들의 생의 질서 중 마지막 단계에 가까울 테고. 우리 부부 또한 머지않아 맞을 시간이고. 그래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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