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충전소] 알렉상드르 예르생
[지식충전소] 알렉상드르 예르생
  • 최광익
  • 승인 2023.12.03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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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의사이자 세균학자인 예르생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1935년 달랏에 처음 문을 연 후,
하노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겨났다.
△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장·교육칼럼니스트]
△최광익 [전 하노이한국국제학교장·교육칼럼니스트]

베트남 도로는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越盟)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제압한 뒤 하노이로 들어와 제일 먼저 한 것은 도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들은 식민잔재를 없애기 위해 앙리 리비에르, 롤랑, 가르니에 등과 같은 프랑스 이름의 거리를 리타이또, 하이바 쯩, 쩐흥다오 같은 옛 영웅들과 판보이쩌우, 판쭈찐 등 근대 민족주의 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 많던 프랑스 이름의 길은 하노이에는 예르생(Yersin) 거리 단 하나만 살아남았다. 베트남인들이 기억하고자 남겨놓은 예르생은 누구인가?

알랙상드로 예르생(Alexandre Yersin)은 1863년 스위스에서 중학교 교사이자 곤충학자였던 알랙상드로 예르생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밑에서 누나와 함께 자란 예르생은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게 된다. 프랑스에 살던 외가와의 인연으로 파리로 이주하고 당시 광견병 백신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파스퇴르연구소의 창립 멤버가 된다.

그러나 파스퇴르연구소의 젊은 연구자인 예르생은 답답한 연구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삶을 원치 않았다. “움직이지 않은 건 사는 게 아니다”라고 믿었던 그는 넓은 세상을 마음껏 누비고 싶었다. 안정된 연구소 생활을 그만두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바다로 정글로 모험 길에 오른다.

그는 처음에는 사이공과 마닐라를 오가는 배의 선상 의사로 근무한다. 우연한 기회에, 선장의 도움으로, 그는 베트남 냐짱에 정착하게 된다. 냐짱 바닷가에 목조 주택을 짓고 진료실을 개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를 시작한다. 다른 한편으로 탐험을 계속해 베트남 해안에서 육로로 캄보디아로 가는 루트를 최초로 개척하며 그 과정에서 랑비안(Langbiang) 고원을 발견한다. 베트남 총독 폴 두메르는 예르생의 탐험 보고서를 바탕으로 치료기관을 겸한 일종의 요양원들이 있는 고지대 알프스 식 아름다운 산악마을을 건설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달랏(Dalat) 이다.

예르생이 냐쨩에 정착하였다고 해서 의학 연구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그는 사이공에 위치한 파스퇴르연구소 아시아 분원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연구와 실험에 참여한다. 당시 페스트가 창궐한 홍콩으로 건너가 페스트 원인균을 규명하고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그 결과,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즉 페스트균의 학명에는 이렇게 예르생의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노벨상을 받았겠지만, 당시 노벨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냐짱에 살면서 파리에서 가져온 영사기로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이나 채플린 영화를 동네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시간을 보낸다. 베트남 오지를 탐험하면서 산골사람들에게 예방주사 놓아주는 일도 계속한다. 오지 탐험 중 한번은 살인으로 수감되었다가 탈옥한 50여명의 도적 떼를 만나 창이 온몸을 뚫는 부상을 당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총독 두메르의 요청에 따라 하노이로 이주해 의사양성학교인 하노이의과대학을 만들고 병원장으로 2년간 일했다. 그는 베트남에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를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이며, 말레이시아로부터 고무를 들여와 재배에 성공해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이끈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업적에 따라 그는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페스트균 발견과 백신 개발로 인류에 공헌했지만, 세상의 기억에서는 잊힌 사람,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창립 멤버로 세균학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지만, 프랑스에서보다 그들의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에서 더 사랑받는 인물, 알렉상드르 예르생은 1943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해 냐쨩에 묻혔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935년 달랏에 예르생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처음 문을 연 후, 하노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겨났다. 2000년대 냐짱에는 예르생이 생전에 읽던 도서, 메모, 사진, 과학장비 등이 전시된 예르생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예르생 박물관은 바로 베트남 국가문화역사유적지로 등재되었는데, 이는 베트남 정부가 외국인에 대하여 국가문화역사유적지로 인증한 유일한 사례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기억할 것은 반드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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