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박용래)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限界)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斷層),
박용래시선집『먼바다』, [창작과비평사/1984] 에서
눈의 세계는 이 세상이 마지막으로 주는 환상이 아닌가 한다. 추운 겨울, 모든 세상의 꽃과 나무가 숨을 멈추어 있는 듯해도 하늘에서 그 꽃과 나뭇잎을 대신하여 이 지상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을 보면 세상은 아름다움이 자생하는 생태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구조의 세상에서 박용래 시인은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 하얀 단층”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다. 그 하얀 단층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마음의 표정일 것이고 행복일 것이고 사랑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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